김연아 ‘4분10초 드라마’ 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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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 여왕도 예상 못한 점수였다. 전광판에 프리스케이팅 세계신기록인 150.06점이 찍히자 ‘키스 앤 크라이 존’에서 점수를 확인한 김연아가 벌떡 일어나 환호하고 있다. [밴쿠버=임현동 기자]

“오 마이 굿니스(Oh my goodness·오 이런 세상에).”

김연아의 연기를 중계하던 미국 NBC 방송 해설자 샌드라 베직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어냈다. 그랬다. 4분10초 동안 김연아의 연기는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밴쿠버 겨울올림픽 피겨 여자싱글 프리스케이팅 경기가 열린 26일(한국시간) 밴쿠버 퍼시픽 콜리시엄. 21번째 출전선수인 김연아(20·고려대)가 링크 중앙에 자리를 잡자 배경음악인 조지 거슈윈의 ‘피아노 협주곡 F장조’가 흘렀다. 김연아는 서서히 선율에 몸을 실었다.

스-스-슥-.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음악 사이로 얼음 지치는 소리만 새어 나왔다. 연기가 시작된 지 24초. 김연아는 첫 점프인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 루프 콤비네이션을 뛰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12가지 구성요소 중 기본점수(10.00점)가 가장 높은 점프였다. 그런데도 브라이언 오서(캐나다) 코치는 웃지 않았다. 8초 뒤 김연아는 두 번째 점프인 트리플 플립(기본점수 5.50점)을 시도했다. 세 바퀴를 돌고 착지하는 순간 그제서야 오서는 손을 흔들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축복이 된 트리플 플립=김연아는 이번 시즌(2009~2010) 첫 대회였던 지난해 10월 그랑프리 1차 대회 프리스케이팅에서 133.95점의 세계기록을 세웠다. 새 프로그램은 김연아에게 잘 맞는 옷 같았다. 다만 트리플 플립이 문제였다. 김연아는 점프를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0점. 그랑프리 5차 대회에서도 트리플 플립에서 불완전 점프로 0.70점을 받는 데 그쳐 레이철 플랫(미국)에게 프리 1위(합계에서는 김연아가 1위)를 내줬다.

밴쿠버에 와서도 사실 불안했다. 경기 전 몸을 풀 때 김연아는 9번의 점프를 시도했다. 하나만 빼고 다 완벽했다. 트리플 플립은 두 번째 시도에서 성공했다. 하지만 실전에선 달랐다. 완벽한 트리플 플립이었다. 트리플 플립에서 얻은 7.30점(기본점수 5.50점+가산점 1.80점)은 150.06점이라는 ‘기적’의 디딤돌이 됐다. 1988년 캘거리 올림픽에서 오서를 눈물짓게 했던 트리플 플립(당시 오서는 트리플 악셀 대신 트리플 플립을 뛰는 바람에 은메달에 그쳤다)이 22년 뒤 오서와 김연아에게 축복이 됐다. 

◆평가 대신 찬사 보낸 심판들=경기를 마친 김연아는 자신의 연기에 만족해 하며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김연아는 플래시 인터뷰에서 “140점쯤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광판에 150.06점이 표시되는 순간, 깜짝 놀란 김연아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인의 예상을 10점 이상이나 넘어선 점수였다. 심판들은 김연아를 평가하는 대신 자신들의 찬사를 숫자에 담아 보냈다. 프로그램 요소의 5가지 항목 중 ▶스케이팅 기술(9.05점) ▶연기/수행(9.15점) ▶해석(9.10점)에서 9점 이상을 줬다. 이번에 남녀 싱글을 통틀어 김연아 외에 프로그램 요소에서 하나라도 9점 이상을 받은 선수는 없다.

밴쿠버=장혜수 기자, 사진=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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