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년 분단 이야기 '이산타령 친족타령' 관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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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지난해 8월 18일 김포공항. 8.15남북이산가족 상봉으로 평양에서 혈육을 만나고 돌아오는 남측 가족들에 대한 취재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50년만에 여동생을 만나고 돌아오는 소설가 이호철(李浩哲.69)씨가 나오자 신문.방송 기자들이 우르르 몰렸다.

원산에서 나 전쟁이 터지자 고등학생으로 인민군에 동원돼 따발총을 메고 남하하다 국군의 포로가 돼 풀려난 뒤 소설과 온 몸으로 '분단모순시대' 를 헤쳐온 이씨의 발언과 감회에는 남다른 무게가 실리기 때문이다.

"잘 살아줘서 고맙구나. 우리 절대 울지는 말자. 서로의 지금 이 처지를 인정하도록 하자. " 이씨는 자꾸 울먹이려는 여동생에게 이렇게 말했었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1955년 문학예술지에 「탈향」 이 추천돼 문단에 나온 이래 「판문점」 「남풍북풍」 「남녘사람 북녘사람」 등 제목이 말해주듯 이씨는 한국전쟁과 분단, 실향과 이산의 체험을 바탕으로 우리 '분단소설사' 를 열어왔다.

올해 우리 나이로 칠순을 맞는 그가 최근 신작 소설집『이산타령 친족타령』을 펴냈다.

이 소설집에 실린 9편의 중.단편 역시 분단과 이산 체험을 생생하게 전하며 이제 고향 상실이나 이념 갈등 차원이 아니라 "서로의 처지를 인정하도록 하자" 는 대주제로 모이고 있어 이씨 분단소설의 한 결정판으로 읽힌다.

"지난 오십년간 남북 공히, 우리 모두가, 그 '전쟁의 틀' 이라는 규격에 알게 모르게 맞춰져서 살아왔던 것이 아닐까. (중략)우리 모두가 그 절대규격에 길들여지다 못해 어느 한쪽은 완전히 마비상태로 떨어졌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오십년 전에 이 땅에서 벌어졌던 그 전쟁현장, 다시 말해 전장의 생생한 실상, 그 전쟁 중에 일반민중이 처해 있던 실제 정황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

소설집 첫 작품으로 올린 「비법 불법 합법」 에서 작중 화자(話者)인 변호사의 이같은 말처럼 작가는 우선 전쟁의 생생한 한 장면을 보여준다.

며칠간 계속된 중부전선 고지탈환 전투에서 시급한 작전명령을 그만 졸음에 쫓겨 잃어버린 장교의 죄를 뒤집어쓰고 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당할뻔한 한 하사관. 서북청년단으로 활동하며 빼어난 '활약' 을 보였던 그는 그 연줄로 하여 극적으로 구출되는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개된다.

전쟁후 비법.불법으로 공사현장을 전전하며 살아남은 그 하사관은 50년만에 다시 만난 부하 통신병이었던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같은 이런 독종이 우리 대한민국 오십여년의 최저변을 사실상으로 버티고 왔듯이, 지금 북에도 북 세상을 최저변에서 사실상 버팅겨온 나같은 동류항 독종이 분명히 있을 것인데, 지금 내 심정은 북쪽의 그런 자 하나와 만나, 권커니 잣거니 술이라도 한잔 나누고 싶다, 이것이다.

느그네들 좋아하는 그런 잘난 소리랑 일절 없이…. " 체제나 이데올로기 통합 등 '먹물들의 잘난 소리' 가 아니라 잡초같이 살아낸 남북 민중들의 그 생존본능적 측면이 서로 생생하게 통할 때 비로소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작가의 메시지로도 읽힐 수 있다.

표제작 「이산타령 친족타령」은 이산의 원망과 재회의 화해를 다루고 있다.

중국에서 해방을 맞아 귀국하는 북새통 속에서 이웃 과수댁에게 맡긴 큰아들을 잃어버린 부부. 애 못 낳는 과수댁이 일부러 아들을 데리고 사라졌을 것이라 한없이 원망하며 수소문하던 부부는 북한에 그녀와 아들이 살아있음을 알고 상봉한다.

교수로 잘 큰 아들과 그렇게 뒷바라지한 과수댁과 봄눈 녹듯 화해하며.

이와 같이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전쟁과 이산.통일을 관념이나 이념.당위적으로 설파하려 하지 않고 생생한 이야기로, 무엇보다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이런 생생한 이야기 속에서 통일을 향한 구체적인 교감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독자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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