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아로요 정권 '나침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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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갓 출범한 필리핀의 아로요 정권에서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의 모습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본인의 거듭된 부인에도 불구하고 아로요 정권은 사실상 '제2의 라모스 정권' 이라는 말이 파다하다. 헌법의 연임제한규정에 묶여 재출범이 좌절된 라모스 정권이 아로요를 이용해 부활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AWSJ)과 홍콩 일간지들은 라모스가 재부상한 배경을 세가지로 요약했다.

첫째는 아로요의 정권 장악 과정에서 입증된 라모스의 탁월한 조직력과 지도력이다.

지난주 에스트라다 퇴진집회가 한창일 때 라모스는 은밀하게 장성들을 소집했다. 아로요에 대한 군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라모스는 1992년 집권하기 이전에 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냈던 군 원로다. 현 군장성들은 대부분 라모스의 부관 출신이거나 후배들이다.

에스트라다 퇴진시위 막바지인 지난 19일 앙헬로 레예스 군 참모총장, 올란드 메르카도 국방장관 등 군최고지도부가 집단 사임한 뒤 반(反)에스트라다 진영에 합류했던 것도 라모스의 '보이지 않는 손' 덕분이었다.

이를 계기로 라모스는 '아로요 주식회사' 의 최대 주주로 부상했다는 게 관측통들의 이야기다.

둘째는 라모스가 대통령 재임시 보여준 통치능력을 필리핀 국민들이 아직 잊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라모스는 집권 시절 철저하게 일을 챙기기로 유명했다. 군인출신답게 오전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조깅을 한 뒤 집무실에 앉아 꼼꼼하게 정책을 챙겼던 대통령이었다.

그의 정책목표는 '어떻게 하면 성공한 다른 동남아 국가들처럼 발전하는 필리핀을 만들 수 있을까' 에 모아졌다. 라모스가 후임 에스트라다에게 남긴 정책 메모와 권고안은 한보따리 분량이었다.

그러나 에스트라다는 취임 이후 이를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대신 에스트라다는 늦은 밤 한무리의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주요 정책을 결정했다. 국민들이 '라모스식 통치방식' 에 향수를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셋째는 라모스의 탁월한 외교감각이다. 그 배경에는 '가장 영어에 능통한 필리핀 정치인' 으로 불릴 만큼 탄탄한 그의 영어실력이 깔려 있다.

국제회의에서 그의 연설을 들어본 사람들은 모두 "미국이나 영국 정치인들에 뒤지지 않는 수준" 이라고 그의 영어실력을 평가한다. 국제정치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은 거의 라모스의 지인들이다.

형편없이 추락한 경제를 끌어올리기 위해 외국투자자들의 신뢰 회복이 절실한 필리핀으로서는 라모스 같은 외교통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아로요 대통령이 라모스를 지난주 스위스 다보스 회의에 급파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홍콩〓진세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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