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석학 칼럼] 아시아와 신경제의 궁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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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시아 경제위기의 회복 과정에서 아시아 각국은 신경제로의 구조개혁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 경기침체가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일본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아시아 위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대량의 자본 유입과 이른바 '두 가지 불일치' (통화와 기간에서의), 그리고 대량의 자본 유출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이 형성돼 있다.

하지만 그 배경에 각국의 구조문제, 특히 은행과 기업의 지배구조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태국에서는 비은행 금융기관의 도산이, 한국에서는 일부 재벌의 경영파탄이 자본 대량유출의 방아쇠가 됐다.

일본에서도 종래의 주거래은행 제도, 호송선단(護送船團)식 행정, 그리고 그 결과로서 은행의 불량채권 문제가 오랜 불황의 배경에 존재한다.

이에 따라 아시아 위기와 거의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금융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 가운데 한국에서는 재벌 재편성, 일본에서는 금융시스템의 구조개혁이 문제가 돼 정부 정책의 핵심과제가 됐다. 이는 극히 자연스럽고 적절한 것이다.

다만 필자가 염려하는 것은 시장형 시스템으로의 이행은 그 방향이 옳다고는 해도 과연 한국과 일본,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 각국에서 앵글로 아메리카형의 시장 시스템, 기업 경영이 실제로 정착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한 예로 한국과 일본에서는 제품시장과 노동시장에서 소위 내부시장이 형성돼 있어 미국형 개방시장과는 다른 기능을 갖고 있다.

내부시장이 경직되거나 부패하고 그 기능의 효율성이 떨어진 것은 틀림없지만 내부시장의 존재 자체와 기능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 옳은가.

또 한국의 재벌이 보다 투명해지고 가족지배가 약화되고 일본의 계열(케이레츠)보다 열린 형태로 기능하면 신경제에서도 나름대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문은 소위 IT혁명, 또는 인터넷 혁명에 따른 정보자본주의로의 이행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틀림없이 정보통신 혁명은 세계 자본주의의 형태를 크게 바꿀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 정부가 주요한 정책과제로 IT혁명을 채택해 신경제로의 빠르고 원만한 이행을 꾀하고 있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이 있다. IT혁명을 압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미국은 특수한 나라라 할 수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실험을 해 나가는 나라, 또 실패의 자유(freedom to fail)가 존재하는 나라는 미국 밖에 없다.

그것은 역사가 짧은 이민국가로서의 미국이 가진 독특한 문화다. 이러한 미국으로부터 배우고 한국.일본의 기업문화를 그런 방향으로 이끌 필요가 있다.

그러나 미국적 문화가 경제구조와 기업인의 심리 속에 완전히 정착되지 않으면 신경제로의 이행은 실패한다고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다.

신경제로의 이행에 관해서는 아시아와 유럽이 뒤따르는 상황에 있다. 선두주자인 미국이 이미 행한 것을 그대로 모방할 필요는 없다.

혁신가(이노베이터)들은 항상 커다란 장벽에 부닥치며 강렬한 기세로 창조적 파괴를 행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간다.

정보통신분야에서 미국은 분명 이같은 혁신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이란 모델을 보면서 불필요한 파괴(창조를 위해 필요한 파괴가 있음을 인정하지만)를 없애고 이행 비용을 가능한 한 줄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예를 들어 실리콘밸리와 같은 벤처기업의 성지가 있어 많은 닷컴 기업이 경쟁하면서 신경제로 이행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브랜드 네임을 가진 대기업의 분사(分社)나 재벌 자회사 등이 유리하게 경쟁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사실 아시아에서는 벤처기업이 주도하는 형태가 아닌 대기업과 재벌의 자회사와 분사들이 신경제로의 이행을 이끄는 경향이 꽤 크다. 벤처기업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기술로 새로운 사업을 펼쳐 나가는 것은 반드시 주식시장에서 기업공개를 갓 끝낸 소위 벤처기업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과 일본이 예전부터 갖고 있는 내부시장을 신기술에 적응시켜 보다 투명하고 열린 것으로 만듦에 따라 우위를 확보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필자는 기업과 은행의 관리에 관한 구조개혁과 IT혁명에 적응하는 신경제로의 이행에서도 '제3의 길' 이 있다고 생각한다.

변혁의 속도를 늦추자거나 잘못된 옛 관행에 매달리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와 문화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제학적으로 말하면 각각의 나라는 다른 초기조건을 갖고 있다. 한국도, 일본도 미국으로부터 배울 수는 있지만 미국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으로 인터넷 비즈니스에서 하나의 큰 포인트는 기업간 거래(B2B)가 될 것이다. 이는 경우에 따라서는 일종의 내부시장을 만드는 일이 된다.

생각해 보면 한국의 재벌과 일본의 계열도 하나의 B2B 거래구조다. 재고관리의 효율화란 면에서 도요타의 간판방식(看板方式)이 주목받은 적이 있었다. 인터넷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이는 B2B거래의 정보와 기술의 이전을 빠르게 함에 따라 효율을 높인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재벌과 계열을 종래대로 온존시키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의 시스템이 가진 것 가운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은 살려 나가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신경제의 성장은 당연한 일이다.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전 일본 대장성 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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