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종목’은 옛말, 흑인 데이비스 빙속 1000m 2연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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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호 16면

첫 흑인 메달리스트 데비 토머스(1988 캘거리대회).

겨울올림픽을 ‘순백의 제전’이라고 부른다. 하얀 눈에서 펼쳐지는 스키와 투명한 얼음판에서 열리는 빙상으로 이뤄져 있으니 그 말이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백인들의 잔치’라는 뜻이다.

겨울올림픽 인종 장벽 무너진다

지금 캐나다 밴쿠버에서는 2010년 겨울올림픽이 한창이다. 한번 TV 중계 화면을 유심히 살펴보라. 한국과 중국, 일본 선수 정도만 빼고 거의 백인이다. 백인의 전유물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1991~95년 유럽 피겨 챔피언 수리야 보날리.

그런데 우리 국민들 눈에 확 들어온 흑인 선수가 있다.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한국에 첫 금메달을 안긴 모태범(21·한국체대) 선수가 2관왕을 노렸던 1000m에서 금메달을 딴 샤니 데이비스(미국)다. 데이비스는 막판 무서운 스퍼트로 모태범을 따돌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피부가 검은 빙상 선수를 거의 본 적이 없는 데다 실력까지 출중하니 더욱 강한 인상을 남겼다. 쇼트트랙 선수를 겸했던 데이비스는 스피드에 전념해 이번에 다관왕을 노리고 있다.

데이비스는 2006년 토리노올림픽 때도 남자 1000m에서 우승, 흑인 금메달리스트로서 뉴스의 한복판에 섰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 겨울올림픽 사상 첫 흑인 금메달리스트라며 주목했지만 사실 첫 흑인 금메달리스트는 그보다 4년 전에 탄생했다.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 때 봅슬레이 여자 4인승에서 금메달을 딴 보네타 플라워스(미국)다. 플라워스는 당시 200명이 넘는 미국 선수단 중 유일한 흑인 선수였고, 금메달까지 따서 화제가 됐다. 그러나 헬멧을 쓰고 철제 썰매를 타는 경기 특성상 피부색이 잘 드러나지 않았고, 4명 중 한 명이라는 사실로 인해 의미가 많이 축소됐다.

겨울 종목에서 흑인 선수를 찾기는 힘들다. 역사를 다 뒤져봐도 별로 없다. 아프리카와 중남미 등 흑인들이 많이 사는 국가는 대부분 겨울 스포츠를 즐길 수 없는, 더운 나라다.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프랑스·네덜란드·영국 등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갖고 있었던 몇몇 유럽 국가의 흑인들만 스키와 빙상을 접할 수 있는 여건이다. 1988년 캘거리 겨울올림픽에 출전했던 자메이카의 봅슬레이 팀을 소재로 ‘쿨러닝’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였으니까.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도 개봉됐다.

밴쿠버 겨울올림픽 1000m에서 한국의 모태범을 누르고 우승한 샤니 데이비스. 그는 2006년 토리노대회에서도 1000m 금메달을 따냈다. [밴쿠버 로이터=연합뉴스]

겨울올림픽에서 흑인 선수를 찾아보기가 ‘가뭄에 콩 나듯’ 하지만 그나마 이름을 날린 흑인 선수는 피겨 스케이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캘거리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에 출전한 데비 토머스(미국)는 겨울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메달을 딴 흑인 선수로 기록돼 있다. 당시 ‘피겨 요정’ 카타리나 비트(독일)와 맞붙어 ‘카르멘 전쟁’(프리 프로그램에서 똑같이 비제의 카르멘을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토머스는 1년 전부터 이 곡을 사용했으나 비트가 나중에 이 곡을 선택했다)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토머스는 쇼트 프로그램에서 1위를 했으나 최종 성적에선 동메달에 그쳤다. 그러나 토머스가 운동에 전념하고 흑인으로서 불이익을 받지 않았다면 최초의 금메달리스트가 됐을 거라는 의견이 많다.

토머스는 흑인이라는 점 말고도 공부와 운동을 성공적으로 병행한 선수로도 유명하다. 1967년생인 토머스는 어렸을 때 피겨 스케이팅의 매력에 빠졌다. 그러나 일곱 살 때 부모가 이혼하는 바람에 가난한 흑인 엄마와 함께 살아야 했다. 당시 1년 레슨비가 2만5000달러나 드는 피겨를 배우기엔 벅찬 환경이었지만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투 잡(two job)을 뛰면서도 매일 300마일을 운전해 딸에게 피겨를 가르쳤다. 샤니 데이비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흑인 빙상 선수들의 뒤에는 ‘억척 엄마’들이 있다.

토머스는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지만 대회 때마다 불이익을 받자 “더 이상 심판들에게 내 삶을 맡기지 않겠다”고 선언, 공부를 병행했다. 성적으로 명문 스탠퍼드대학에 입학한 토머스는 피겨에서도 86년 미국선수권과 세계선수권 싱글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한다. 88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토머스는 의학 공부를 계속해 현재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사실 캘거리올림픽은 우리 기억에 별로 남아있지 않다. 그해 여름 서울올림픽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었고, 당시만 해도 겨울올림픽 메달은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쇼트트랙은 시범경기였다. TV 중계도 별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토머스를 기억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반면에 98년 나가노올림픽 피겨 여자싱글에 출전한 수리야 보날리(프랑스)를 기억하는 사람은 제법 있다. 보날리는 실력으로 금메달에 가장 근접했던 흑인 선수였다. 91년부터 95년까지 5년 연속 유럽선수권을 제패했다. 그러나 정작 올림픽에서 첫날 쇼트 프로그램 3위에 그치자 상황은 달라졌다. 판정에 불만을 품은 보날리는 프리 프로그램에서 국제빙상연맹(ISU)이 금지한 백플립을 해버렸다. 쉽게 말해 텀블링을 한 것이다. 최종 순위는 10위였다.

토머스와 보날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어렵게 탄생한 흑인 빙상 선수도 ‘백인 잔치’에서 불이익을 받는 사례가 빈발하면서 재능 있는 흑인 선수들이 겨울 종목보다는 쉽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육상·농구 등으로 쏠리는 현상이 당연시됐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흑인 선수는 샤니 데이비스 말고도 봅슬레이 남자 2인승의 레셀레스 브라운(캐나다)이 있다. 브라운 스토리도 매우 재미있다. 자메이카 출신인 브라운은 올림픽 개막을 불과 한 달 앞두고 캐나다로 국적을 바꿨다. 18년 전 ‘쿨러닝’의 후배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니 이것 역시 영화감이다.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이번 밴쿠버 올림픽에서는 또 하나의 역사가 써졌다. 피겨 스케이팅 페어 부문에 출전한 야닉 보누르-바네사 제임스(프랑스) 조다. 이들은 겨울올림픽 페어 사상 최초로 흑인들로만 이뤄진 조다. 비록 20개 팀 중 14위에 그쳤지만 겨울올림픽에서 ‘블랙파워’가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여자 싱글 영국 챔피언이었던 바네사 제임스가 야닉 보누르와 호흡을 맞춰본 뒤 2007년부터 짝을 이뤘고, 국적을 프랑스로 바꿔 이번에 출전한 것이다.

겨울올림픽이 백인 잔치, 부자들의 올림픽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흑인들에게는 여전히 진입 장벽이 많다. 상체가 발달한 흑인들은 무게중심이 위에 있어서 겨울스포츠에 적합하지 않다는 과학적인 분석이 있지만 그것보다는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빙상이나 스키를 배우는 데 드는 경비는 아무래도 육상이나 농구·축구·야구 등에 비해 많다. 더구나 다른 종목에 비해 마이너리티인 흑인들이 받는 불이익도 많다. 같은 조건이라면 겨울스포츠를 선택하는 흑인이 적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흑인 선수를 찾아보기 힘든 종목은 겨울 종목 외에도 수영, 승마, 자동차 레이스 등이 있다. 그 이유 역시 흑인이 겨울 스포츠를 접하기 어려운 이유와 비슷하다.

하지만 이들 종목에서도 블랙파워가 강세를 보일 때가 머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수영에서 흑인들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지방보다 근육량이 많은 흑인의 신체 특성상 물에 뜨는 데 불리하기 때문이라는 과학적인 분석이 있다. 그러나 수영에서 가장 좋은 기록은 근육량과 지방이 적정 비율을 유지할 때라는 실험 결과가 있다. 근육량이 많으면 추진력이 뛰어나지만 부력이 낮아지고, 지방량이 많으면 물에 잘 뜨지만 근지구력 혹은 근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훈련량에 따라 최고의 조건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체조건 때문에 특정 종목에서 불리하다는 이론은 반박할 여지가 많다.

기본적으로 흑인들의 스포츠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여러 종목에서 입증된 사실이다. 흑인들의 경제 능력이 향상되고, 편견이 점차 없어지는 추세로 미뤄볼 때 겨울올림픽의 블랙파워 역시 강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은 겨울올림픽에서도 세계 10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이번엔 쇼트트랙 외에 스피드 스케이팅과 피겨 스케이팅에서도 세계 정상급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젠 블랙파워도 경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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