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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장경 번역 내달 318권 완간하는 월운스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미련한 놈이 호랑이 잡는 법이야. 나야 주변머리도 없고…, 스승의 가르침만 믿고 평생 대장경 번역만 한 거지 뭐. "

월운 스님은 역경사업을 '호랑이 잡은 일' 에 비유했다.

호랑이는 무섭고도 신령스러운 영물이라 누가 감히 잡으려는 엄두를 못낸다. 그런데 무모하게 그런 놈을 잡겠다고 나섰으니 자신이 얼마나 미련한 사람이냐는 반문이다.

스님은 불교계에서 손꼽히는 학승(學僧)이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미련하다고 말하는 것은 넓게는 세속의 천박함, 좁게는 불교계 일부의 약삭빠른 처신을 꾸짖는 얘기일 것이다.

스님은 그저 몇마디 말을 던지고는 흐뭇한 표정으로 탁자 위의 한글판 고려대장경을 어루만진다.

물론 역경사업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역경사업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당대의 학승 운허(雲虛)스님. 월운 스님의 스승이었다.

운허 스님이 처음 역경원을 만들자 월운 스님은 상좌로 "책 들고 다니는 일" 부터 시작했고, 80년 운허 스님이 입적한 뒤 사업이 지지부진하자 93년 역경원장 자리를 이어 받아 마무리지었다. 그 사이 많은 스님들과 국어학자.한문학자.불교학자들이 번역.윤문 등 분야별로 일을 나눠 맡았다.

"인연은 질긴 것이야.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줄 알았겠어. 어려서 서당에 잠시 다닌 게 인연이 돼 평생을 공부만 했네. "

월운 스님은 28년 판문점 부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25전 하던 월사금(수업료)이 없었다. 17살 되던 해 집안 당숙이 서당을 열어 3년간 한문을 공부했다.

그러던 중 해방이 되고 동네 위로 포탄이 오가는 혼란기가 계속되자 "배 부르게 밥이나 실컷 먹어보고 죽자" 며 가출, 전국 방랑길에 들었다. 경남 남해 화방사에서 절밥을 얻어먹던 중 스님들의 권유로 머리를 깍았다.

한문을 못읽던 스님들이 "너는 한문을 읽을 줄 아니까 글읽기 좋아하는 운허 스님 상좌가 되라" 고 권해 얼굴도 모르는 스승을 모시고 출가했다.

한참 뒤 부산 범어사로 찾아가 운허 스님을 만나 글을 지어 올렸는데, "미면경정(未免徑庭.마당가에 서성거리는 정도의 학문에 불과하다)" 이라는 낙제점을 받았다.

이후 월운 스님의 수행은 스승의 학문을 이어받는 학승의 길이었고, 구체적으로는 "승려가 해야할 으뜸 일" 인 역경사업을 이어 받는 일이었다.

"옛날에는 호랑이를 잡으면 관아에 나가 먼저 볼기짝을 세 대 맞고, 그 다음엔 상을 받았거든. 그런데 나는 상은 못 받고 볼기짝만 맞게 생겼어. "

관아에서 볼기짝을 때리는 것은 "귀한 목숨을 함부로 내놓으려하면 안된다" 는 상징적 의미의 통과의례다.

그런데 스님이 "진짜 볼기짝을 맞게 생겼다" 며 우려하는 것은 번역에 부족함이 많기 때문이다. 예산부족으로 36년에 걸쳐 하다보니 과거 번역본에 틀린 것이 많고 체계도 제대로 안잡혔다.

"이제 겨우 한고비 넘긴 셈이고, 앞으로 수정본을 새로 만들고 다시 전산화해 아무나 필요한 불경을 쉽게 찾아보도록 해야지. 쉽진 않겠지만…, 역경사업 많이 후원해달라고 신문에 쓰면 금방 될거야. "

스님은 오직 역경 생각뿐이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2차 수정작업에 팔을 걷어부칠 기세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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