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세 아버지와 54세 딸, 한 고교서 졸업 파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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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배(84·왼쪽에서 둘째)씨와 딸 김화자(54·왼쪽에서 셋째)씨가 19일 서울 숭인동 진형중·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졸업식을 마친 뒤 아들(왼쪽)과 며느리(오른쪽)의 축하를 받고 있다. [안성식 기자]

19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숭인동 진형중·고등학교 졸업식. 만학도를 위한 4년제 중·고등학교에서 ‘배움의 한’을 푼 졸업생들의 얼굴은 밝았다. 그중에서도 김종배(84)씨와 김화자(54)씨가 특히 눈에 띄었다.

이들은 부녀 사이다. 4년 전 동급생으로 입학해 이날 나란히 졸업장을 받았다. 검은 졸업 가운을 차려 입은 부녀는 환하게 웃는 얼굴이 ‘닮은꼴’이었다.

“우리 딸을 내가 초등학교밖에 못 가르쳤어요. 7남매 중 외딸인 이 아이만….”(아버지)

“제가 입버릇처럼 ‘중학교만 나왔더라면’이라고 했거든요. 그게 마음에 계속 걸리셨나 봐요.”(딸)

2006년 2월 28일 아버지는 지하철에서 신문을 읽다가 만학도가 다닐 수 있는 신설 4년제 중·고교 광고를 봤다. 무작정 학교로 달려가 딸을 등록시켰다. 혼자 학교에 다닐 딸이 안쓰러워 자신도 등록했다. 그도 ‘서당 출신’으로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였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더 공부에 재미를 붙이신 거죠. 최고령 학생이자 유일한 장학생이셨어요.”

7년 전 상처(喪妻)하고 서울 아들 집에 살던 아버지는 안양의 딸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부녀가 함께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공부는 어려웠다. 매일 새벽 3시까지 매달려야 겨우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다. 4년을 꼬박 새벽 공부를 하다가 아버지는 눈에 병이 나서 안과까지 다녔다. 부녀는 시험 때마다 몸살을 앓을 정도로 공부했다.

“밤에 공부하다가 아버지께서 저한테 은근히 물어보세요. ‘너는 집중이 잘 되냐?’ 제가 ‘다 똑같죠, 뭐…’ 라고 답하면 ‘내가 너처럼 암기가 되면 얼마나 좋겠니?’라며 속상해하시더라고요.”(딸)

“열 번을 봐도 열 번 다 금세 머리 밖으로 달아나 버리더라고요. 공부라는 게 남의 것을 내 속에 넣는 건데…쉬운 일이 아니잖소.”(아버지)

아버지에겐 특히 영어가 어려웠다. 알파벳은 익혔지만 영어회화는 넘을 수 없는 벽 같았다. 딸에게 “왜 넌 되는데 나는 안 되냐”고 투정하기도 했다. 영어·수학만 따로 과외를 받고 싶다고 푸념도 했다.

그래도 초등학생을 대하듯 쉽게 풀어서 가르쳐주는 선생님들 덕분에 끝까지 해낼 수 있었다. 폭설이 와도 한파가 닥쳐도 자전거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며 학교에 나왔다. 4년을 꼬박 붙어다니다 보니 ‘재혼한 부부’로 오해받기도 했다.

“사실 중학교 2년 과정 동안 너무 힘들어서 고등학교 과정은 포기할까도 생각했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가길 얼마나 잘했는지 몰라요. 중학교 때 배운 내용이 또 나오더라고요. 어찌나 신이 나던지….”

딸은 이때 예전에 공부했던 기초 위에 새로운 지식을 쌓아가는 ‘공부의 맛’을 알았다고 한다.

이들에게 성적을 물었다. 어리석은 질문(愚問)에 현명한 답변(賢答)이 돌아왔다.

“점수나 성적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공부하려고 학교에 간 건데요. 한 자라도 더 머리에 넣는 게 중요하지요.”(아버지)

“몇 등이냐고요? 저희는 시험은 보지만 성적은 몰라요. 선생님들께서 ‘쇼크’ 먹을까봐 안 가르쳐 주세요.”(딸)

부녀는 중학교 때부터 필기한 노트를 모두 모아뒀다. 졸업 후에도 외출할 때마다 들고 다니며 복습하기 위해서다. 대학 진학도 꿈꾸고 있다. 딸은 컴퓨터 전공, 아버지는 의대가 목표다. 아버지는 “새로운 화상 치료법을 개발하고 싶다”며 굳은 의지를 보였다. “살아있는 한 공부할 수 있다”는 이들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글=구희령 기자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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