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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약해서 강한 나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이 나라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잘 살까. 벨기에를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갖게 되는 의문이다.

땅덩이가 크지도 않다. 자원이 풍부한 것도, 이렇다 할 세계적 기업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무엇보다 이 사람들은 장사를 잘한다. 여러 업종의 상인 조합, 길드가 지금도 시청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얼마나 아름답고 장사를 잘 했으면 루이 14세가 질투한 나머지 불을 질렀을까. 벨기에는 예부터 유럽 교역의 중심이었고 거기다 상인들끼리의 경쟁 룰이 엄격했다.

누가 외국 장사꾼과 흥정을 할 때면 다른 사람들은 그냥 지켜만 볼 뿐, 같이 붙어 가격 경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간 자꾸 값이 떨어져 결국엔 모두가 망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장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현명한 경쟁이다. 감탄하는 나를 쳐다보면서 안내원이 씁쓸하게 웃는다.

"그 슬기를 터득하는 데 천년이 걸렸습니다" "네?" 그러고 보면 우리도 실망할 일이 아니구나. 한결 위안이 된다.

인삼을 사러 온 외국 바이어가 만나는 사람마다 가격이 떨어지니, 가짜 인삼인가, 값도 물건도 믿을 수 없어 결국 못 사고 돌아갔다. 이게 우리가 하는 장사 스타일이다.

공생이냐, 공멸이냐, 그 뼈아픈 교훈을 터득하는 데 천년이 걸렸다니. 우린 얼마를 더 가야 하는 걸까. 외국과의 본격 교역이 1백년도 채 안 되는데 이만큼이라도 하는 걸 신기하게 생각해야 될까.

도시가 좁기로도 우리와 닮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엄청나게 다르다. 수도 브뤼셀의 좁은 도로를 보노라면 공생의 슬기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일상 생활 깊숙이 양보의 정신이 몸에 배어 있다. 그 좁은 2차선 도로에 보행로.자전거.주차장.버스.전철, 그리고 중앙 분리대에 정원이 있다. 따로지만 서로는 반쯤 겹쳐 있다. 고로 버스와 전철이 나란히 달릴 수가 없다.

어느 하나가 먼저 길에 나서면 다른 건 그 뒤를 엇비슷이 달려야 한다. 양보 없이는 절대로 통행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교통은 아무 정체 없이 물 흐르듯 돌아간다. 이것이 벨기에 사람들의 생활 슬기다.

피침의 역사에서도 우리와 비슷하다. 하지만 투쟁 방식이 전혀 다르다. 주위엔 한때 세계를 제패한 강국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벨기에의 역사는 피침 그 자체다. 정복자가 바뀔 적마다 피의 숙청이 진행된다.

프랑스가 득세하면 영국 편을 들었다고 얻어맞고. 영국이 득세하면 또 반대파가 쫓겨나는 수난의 반복이었다.

지금도 공통어가 세 나라 말로 돼있다. 나폴레옹군이 연합군에 대패한 그 유명한 워털루 전쟁도 벨기에의 한 복판에서 벌어졌다. 제 안방에서 싸워도 눈 한번 흘겨 볼 수 없다. 저항하지 않았다. 할 수도 없었다. 모든 걸 수용.포용하는 인내의 역사였다. 그게 생존의 수단이었다.

나토.유럽연합(EU) 사령부가 브뤼셀에 설치된 건 벨기에인의 수용과 인내의 산물이다. 이제 이곳은 세계 외교가의 중심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당장 도시의 격이 달라지고 정치.경제 모든 면에서 엄청난 파급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따라서 유럽 열강은 이 기구들을 유치하려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승자는 조용히 때가 오기를 기다린, 처분만 믿고 기다린 벨기에로 낙착되곤 했다.

이것이 벨기에의 저력이다. 무모한 대결은 피한다. 경쟁은 하되 대결은 하지 않는다. 상생.공생의 원리가 몸에 젖어 있다. 이것 없이는 공멸밖에 없다는 걸 뼈아픈 체험을 통해 터득한 것이다.

배타적이지 않고 모든 이질적 요소, 심지어 침략자까지도 수용하는 인내의 역사가 오늘의 영광을 안겨준 것이다.

벨기에는 약했다. 그러기에 강할 수 있었다. 약자의 생존 논리를 가장 현명하게 잘 터득한 슬기로운 나라다.

우리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슷한 데가 많다. 하지만 약자로서의 대응 전략에서, 국민의 심성에서 우린 아직 갈 길이 멀다.

새해 아침, 다기능이면서 막힘이 없는 브뤼셀의 좁은 2차선 도로를 생각하며 공생.공존의 슬기를 다듬어 본다.

국제 학회장의 학술 전시실에 상품 판매대가 설치돼 있는 곳도 브뤼셀에서 처음 봤다.

'수준 높은 선물, 시내보다 쌉니다' . 철저한 프로다. 이것도 배워야 한다.

이시형 <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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