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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포퓰리즘 유령이 어른거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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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병완 전 대통령 비서실장의 기억도 똑같다. 그해 9월 30일 출사표를 던지기에 앞서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캠프 수뇌부는 수도 이전 공약에 찬반이 팽팽하게 갈렸다. 연설문 기초자인 이 전 실장이 나섰다. “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적어도 전국지 1면에 나오고 최소한 충청권 언론에서 1면 톱이 될 것이다.” 노 후보가 반문했다. “지금 형편에 이걸 내놓으면 웃음거리 안 될까요?” 이 전 실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노 후보가 잠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면 그렇게 갑시다.”(이병완, 『박정희의 나라 김대중의 나라 그리고 노무현의 나라』)

이렇게 탄생한 행정복합도시 공약 때문에 온 나라가 9년째 홍역을 앓고 있다. 포퓰리즘은 대체로 지지율이 뒤처지는 정치가들의 도피처다. 합리적인 이성보다 대중의 불만이나 감정을 자극해 최후의 도박에 나선다. 문제는 포퓰리스트 후보들이 극적인 역전극에 성공했을 경우다. 엄청난 후유증이 남고 한국도 뒤늦게 그 진통을 경험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선거가 거듭될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공약들이 넘쳐난다는 점이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초·중·고교 무상급식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야당 출마 예상자들이 대부분 무상급식을 약속하고, 일부 한나라당 인사들도 “무상급식은 의지의 문제”라며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무상급식을 하려면 전국적으로 매년 1조8000억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무상급식에 찬성하는 입장이다. 가난으로 눈치 살피는 학생들이 안쓰럽다. “학교가 무상급식소냐”라는 반대 목소리도 귀에 거슬린다. 다만 우리 사회가 고통 분담에 흔쾌히 나설지는 자신이 없다. 무상급식을 하려면 세금을 더 내든지 아니면 다른 교육예산을 깎아야 한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무상급식에 찬성하는 학부모의 비율은 90%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세금을 더 내는 데 반대하는 응답자도 90%가 넘는다. 이런 길항관계부터 풀지 않는 한 무상급식은 선심성 공약이나 마찬가지다. 불길한 대목은 이런 정책 공약을 상대 후보를 정치적·이념적으로 공격하는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지지율이 뒤처지는 후보일수록 기를 쓰고 이 공약에 매달리는 것도 꺼림칙하다.

올해 세계 경제의 최대 위협은 국가재정의 위기다. 세계의 주요 은행과 부도 대기업들은 대부분 국유화됐다. 나랏돈으로 위기를 틀어막은 것이다. 재정위기는 금융위기 이후 맞을 최후의 위기이며, 한번 도래하면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나 스페인을 보면 실감난다. 지난해 말 전 세계 국가 부채는 49조5000억 달러로 경제위기 직전보다 45%나 늘었다. 앞으로 중앙은행들의 출구전략으로 금리가 오르면 이자 부담 때문에 재정위기는 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진정한 비용은 지금부터 치러야 한다.

청와대가 “우리 재정이 튼튼하다”면서도 무상급식을 박대하는 것은 수상하다. 알려지지 않은 겁나는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정부 부채 말고도 세금으로 갚아야 하는 적자성 채무의 증가 속도가 너무 가파르다. 더 이해 안 되는 것은 야당이다. 민주당은 “지방선거에서 빚더미 정부를 심판해야 한다”고 하면서 “무상급식을 확실한 공약으로 내걸고 국민의 판단을 받겠다”고 했 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놀라운 마법을 부리겠다는 공약을 보면서 자꾸 노무현 후보의 이미지가 어른거린다. 논설위원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