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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교양] 혁명의 소용돌이도 사랑을 끊을 순 없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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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가장 어렵고 궁극적이며 최후에 겪는 시련입니다. 다른 모든 일이란 실로 그 준비에 불과할 뿐입니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지음, 창비, 424쪽, 1만2000원

루쉰의 편지
루쉰·쉬광핑 지음, 임지영 옮김
이룸, 416쪽, 1만7900원

그리운 J, 잘 지내고 있나요? 가을입니다. 산책길에 벌써 떨어진 낙엽들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낙엽도 첫 번째 꽃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신기합니다. 지난 주에는 효석이 살던 마을에 흰 소금처럼 뿌려져 있다는 메밀꽃을 보러 갔더니 꽃은 지고 들판에 노란 빛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벼이삭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처음 생각했습니다. 아직도 제게 ‘처음’ 이라는 것들이 있어서 세상은 살만하고 인생은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죽는 날까지 그러고 싶습니다.

두 권의 인상적인 책을 읽었습니다. 정수일 선생의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와 『루쉰의 편지』가 그것입니다. 신기하게도 두 권의 책은 닮아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혁명가이자 뛰어난 문필가라는 점, 비바람 치는 조국의 어떤 시대에 그 비를 원망 없이 다 맞았다는 점, 그리고 그들은 사랑하는 여자에게 긴 편지를 썼습니다.

이 책들은 절절한 사랑의 편지들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 거하고, 사랑을 애틋하게 하는 일은 결국 같은 일이구나, 뭐 이런 생각, 조금 다른 이야기 같습니다만 어떤 수도원에서 들었던, 결국 좋은 남편이 될 사람이 좋은 수도승이 된다는 말 같은 거, 뚱딴지같게도 약간의 질투도 일었습니다. 그러면서 한편 그들이 사랑 앞에서 그토록 순진무구하고, 상처받기 쉬우며 실은, 존재 깊숙이에서 떨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그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더해주었습니다.

그들이 이 편지를 쓸 무렵 그들은 모두 인생의 가을에 서 있었다는 것, 그래서 릴케 식으로 표현하자면 “끝없이 불안하고 간통과 혼란으로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운명에 닿아” 있다는 것을 제가 느꼈다는 말입니다. 편지를 쓸 때 정수일 선생의 경우는 간첩 활동으로 사형을 구형받고 수감돼 있었고, 루쉰의 경우는 유부남이 17세 연하의 제자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둘은 끝내 결혼하게 됩니다만, ‘바른생활 아줌마’인 제 친구가 이 글을 본다면 어떨까, 실은 겁도 납니다.

죄를 선고하기 위해 판결문을 꺼내든 판사가 소설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표현할 만큼 “드라마 같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 정수일을 아시나요? 예전에 우리가 깐수라고 불렀던 사람, 아내에게조차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못했던 간첩, 옌볜에 있는 시인 윤동주의 옆 동네에서 태어나 중국 국비 장학생 1호로 카이로에 유학했고,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외무부의 고위 관리자리를 약속하고 조카딸을 주려고 했지만 조국이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싫다며 평양행을 감행했던 사람, 동양 언어 7개와 서양언어 5개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도 모자라 산스크리트어를 비롯한 고대 언어를 공부하는 사람, 4년간의 감옥 생활 동안 원고지 2만5000장 분량의 책을 써낸 사람, 프랑스어 외에는 세계에 완역본이 없다는 『이분 바투타 여행기』( 창비)를 완역하고 문명교류사에 관한 주옥같은 책을 펴낸 그 사람 . 중국에서 25년, 북한에서 15년, 해외에서 10년, 남한에서 12년간 살면서, 심지어 알제리 전쟁의 벙커 속에서도 책을 놓아 본 적이 없다는 사람. 그 사람이 수감된 후 아내에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인고의 쓰라림을 더 이상 안겨주지 않기 위해‘나를 잊어주오’라고 단장의 절규를 한 바 있었지. 그러나 당신은 ‘기다림’으로 ‘잊음’을 멀리하겠다고, 정녕 기담(奇談)같은 큰 사랑으로 화답해 왔소(…) 몇 분의 만남을 위해 한나절을 보내고, 이것저것 마음을 써야 하는 짓궂은 옥바라지가 퍽 힘겹지? 무엇을 자꾸 사들여 보내지 마오. 이제부터는 한푼이라도 아껴 써야 하지 않겠소?” 그동안 차마 말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아내에게 밝혀가면서 그는 사랑과 부드러움의 힘을 깨달아갑니다.

“쉴새없이 글을 써대는 나에게 받치고 쓸 것이 없다는 것은 큰 곤욕이 아닐 수 없소. 더구나 무릎인대가 늘어나고 슬관절에 이상이 생겨 다리가 부석부석 부어 있는 상태에서 두 다리를 포갠 채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아무데나 대고 쓴다는 것은 고문과 별반 다름없는 고통의 연속이었소”라고. 하지만 그는 아파트 문짝보다 조금 큰 그 방을 수행의 도량 삼아 인생을 전진시킵니다.

아내가 넣어준 영치금을 아껴뒀다가 아내의 생일날 그것을 다시 보내는 그 마음씀이나, 걱정할까봐 숨겨두었던 부석부석한 오른쪽 다리를 내보이고 희묽게 변색된 왼쪽 다리는 차마 더 보여줄 수 없었던 대목에서는 그만 눈물이 핑돌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늙어서 죽는 것보다 늙어서 낡아지는 것이라고.

그런 그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 루쉰의 책을 제가 집어 든 것은 우연만은 아니었겠지요. 사상가이며 혁명가, 그 자신 20세기 중국뿐 아니라 동양의 눈 밝은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가 루쉰입니다. 부모가 억지로 맺어준 아내가 있었기에 그의 사랑은 이미 비극적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내도 희생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위해 아내를 버린다면 사회적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어 (…) 사회투쟁과 문화혁명 사업에 차질을 빚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입니다.

“고통과 인생이란 항상 서로 연관돼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고통이 잠시 사라질 때가 있다면 단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뿐입니다. 오만과 냉소주의는 깨어 있는 동안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 줄 뿐” 이라고, 막 사랑이 싹틀 때, 마치 예언처럼 그는 쓰고 있는 거지요. 그가 자신의 인생과 사회를 다른 것으로 놓고 보지 않았기에 그의 사랑은 통속에서 구원됩니다.

그의 사랑은 당시 중국, 신문화와 구문화, 시대상황과 정서의 모든 충돌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열일곱살의 나이 차이, 그리고 제자와 학생, 남과 여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루쉰은 그의 연인 광핑을 끊임없는 존중과 신뢰로 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이 사람이 정말 50을 바라보는 그 혁명적인 대작가가 맞는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가령 이런 대목입니다.

서로를 위해 각자 다른 도시에서 떨어져 있기로 한 후, “눈이 빠지도록”편지를 기다리던 그는 “매일같이 그녀의 꿈을 꾸다가” 드디어 그녀에게 “강의를 듣는 여학생에게 절대로 한눈 팔지 않을 것” 이라는 맹세까지 하게 되더니 “먹을 것도 아무거나 먹지 않아요. 술도 줄이고 위험한 바다에서 수영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합니다. 당연히 이 구절은 “당돌하고 거침없는 질문을 즐기던 조그만 여학생”이며 그의 사상적 동지이자 혁명가였던 광핑의 질책을 받게 됩니다.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아무리 맹세한다 해도, 한 순간에 저절로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어요?” 그러나 루쉰은 이 사랑을 감출 수가 없었고, 유언비어와 비난이 몹시 거세어 집니다. 루쉰은 드디어 거기에 저항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폭로해도 그만이고 폭발해도 좋다”면서 “과거는 군중을 구원하고픈 마음에서 포용했다. 그러나 지금은 오직 한 사람만을 구원하고픈 심정”이라고 일갈합니다. 혁명가이자 사상가였던 사람이 마침내 예술가로 남게 된 것은 바로 이 지점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저의 과민일까요? 그 후 두 사람은 결혼해 8년간을 극진한 사랑 속에 살다가 루쉰이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운 J…, 이들의 편지가 남은 까닭은, 그래서 오늘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야 말게 하는 까닭은 사랑했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실은 거리를 두고 사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었다면, 저는 이렇게 긴 편지를 쓰는 ‘처음’을 갖는 기쁨도 누리지 못했겠지요. 오늘 나는 아마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을 꺼내들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옛적에 초록빛 연필로 밑줄 쳐놓은 구절을 다시 읽게 될 것만 같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가장 어렵고 궁극적인 것이며 최후의 시련이요, 다른 모든 일이란 실로 그 준비에 불과합니다. 사랑하는 일이란 한결 높고 고독한 독거입니다” 라는 구절을요. “아무리 맹세해도 한 순간에 눈이 번쩍 뜨이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창밖의 하늘은 푸르고 대기는 더할 수 없이 투명한 이 가을을 나는 지금 막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다시 만나지 못할 J, 그러면 안녕히.

공지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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