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발목잡는 소비침체 실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최근의 소비심리 위축은 소득 감소.대외여건 악화 등으로 설명하기엔 그 정도가 지나치다.

경기가 둔화한다지만 경제지표들이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과 비교하면 좋은 편인 데도 소비심리만은 98년 수준으로 얼어붙은 상태다.

전문가들은 가계.기업 등 경제주체들이 극도의 불안감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고 있다. 한번 위기를 체험한 국민이 최근 경제성장률이 둔화하고 주가.원화가치 급락 등이 겹치자 경제위기 재연을 우려, 우선 소비부터 줄이고 나섰다는 것이다.

◇ "줄어도 너무 줄었다" =소득이 줄면 소비가 주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최근엔 소득증가율과 소비증가율간의 격차가 너무 벌어져 있다.

한국경제가 거둔 실적을 대표하는 경제성장률(GDP.국내총생산 기준)이 2분기 9.6%에서 3분기엔 9.2%로 소폭 줄어든데 비해 민간소비증가율은 같은 기간 중 8.9%에서 5.7%로 급락했다. 한은 관계자는 "소비가 줄어도 너무 줄었다" 고 말했다.

실제로 주요 소비재들의 판매실적은 최근 눈에 띄게 위축되고 있다. TV.세탁기.냉장고.승용차 등 내구재 소비의 경우 증가율이 지난 1, 2분기에 각각 44%, 26.2%를 기록했다가 3분기엔 9.0%로 크게 감소했다.

내구소비재는 증시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통상 주가가 10% 하락할 때마다 내구재 소비가 6.5%씩 감소한다는 게 한은의 추산이다. 올들어 주가가 30% 이상 폭락한 점을 감안하면 이같은 내구재 소비 감소는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생필품의 성격이 강한 어패류.과일 등 비내구재 소비 역시 2분기의 6.3%에서 3분기엔 3.0%로 증가율이 크게 둔화했다는 점. 심재웅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비내구재 소비의 경우 단기적인 경기변동보다 장기적인 소득전망의 변화에 좌우된다" 면서 "비내구재 소비까지 급감한다는 것은 우리 국민이 미래에 대해 갖는 불안감이 그만큼 크다는 것" 이라고 진단했다.

◇ 소비 너무 줄면 장기 불황=소비는 전체 GDP 구성항목 중 5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소비가 정도 이상 줄 경우 소득 감소로 이어지고 다시 소비가 줄어드는 악순환이 초래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런 악순환이 장기불황으로 빠져들 경우 자산이 넉넉한 상류층보다 중산층.저소득층의 고통이 훨씬 심해진다는 것이다.

올들어 전반적으로 내수(소비+투자)가 침체된 가운데 수출이 혼자서 우리 경제를 이끌어왔으나 내년엔 수출마저 크게 악화할 전망이다.

따라서 소비가 웬만큼 성장을 이끌어줘야만 외환위기 직후같은 급격한 경기침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한창수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소비심리만 안정된다면 우리 경제가 내년 상반기 저성장을 거쳐 하반기엔 회복국면 진입이 가능하지만 심리불안을 해소하지 못할 경우 침체국면이 지속될 전망" 이라고 내다봤다.

그렇다고 단기적인 부양책을 동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구조조정을 조속히 마무리해 경제 전반에 팽배한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책이라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준일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또한 경제주체들도 과도한 불안감에서 빠져나와 가계는 합리적인 소비를 이어가고, 기업 역시 축소일변도의 전략 대신 기술개발 등 미래지향적 투자에 나서야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신예리.서경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