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4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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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43. 구소련 군의관의 폭로

세균전은 태평양전쟁 뿐 아니라 한국전쟁에서도 뜨거운 논쟁거리로 부각된다.

냉전시대에도 나는 세계보건기구 자문관 자격으로 중국이나 소련 등 당시 적성국가로 분류돼 입국이 불가능한 나라들을 방문할 기회가 많았다.

이들은 한결같이 한국전쟁 때 미군이 북한과 중공군에 대해 세균전을 펼쳤다고 주장했다. 내가 만난 한 중국인 학자는 미군이 중공군의 집결지였던 신의주 맞은편 국경지대에 다량의 페스트균을 살포했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직접 페스트 세균을 갖고 있는 쥐를 채집했는데 만주엔 전혀 살지 않는 새로운 쥐였다는 것이었다.

미군 비행기가 밤 사이 지나가고 나면 마을 근처에 빵이나 닭털 등 이상한 물건들이 떨어져 있고 여기에 균이 묻어있었다는 말도 들었다.

당시 포로가 된 미국조종사의 입을 통해 대구의 미군비행장에 세균폭탄이 있다는 증언도 나왔다고 한다. 그는 미군 비행기에서 떨어진 세균폭탄을 전시하며 내게 설명하기도 했다.

세균폭탄은 일반 폭탄과 달리 화약 대신 인공배양된 세균덩어리를 담은 것으로 땅에 떨어진 뒤 파편으로 조각나지 않고 쪼개지기만 하는 특수한 구조로 이뤄져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세균입자가 고루 퍼지려면 지상 1백미터 이내에서 분말형식으로 비산돼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고도의 폭탄제조기술이 있어야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세균전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그들의 주장일 뿐이며 증거는 없었으므로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고 본다.

실제 종전후 북한과 중공의 요청으로 UN에서 중립국 학자들이 의심되는 물건을 수거해 조사했으나 미군이 세균전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도 세균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물무기는 핵무기나 화학무기처럼 눈에 보이는 폭발적인 파괴력은 없지만 은밀하게 진행된다는 점에서 훨씬 무섭고 잔인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이유 때문에 70년대 미국과 소련이 동서 냉전시대를 주도할 때 극비리에 양 국가에서 생물무기개발이 진행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생물무기와 관련해 가장 쇼킹한 사실은 옛 소련군 생물무기개발 담당자인 알리베크대령의 증언이다. 그는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군의관으로 수십년간 생물무기를 연구해온 전문가다.

90년대초 소련연방이 붕괴하면서 미중앙정보부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베일에 갇혀왔던 소련의 생물무기 실상을 폭로했다.

그는 지구상에서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천연두바이러스가 사실상 소련에 의해 해마다 20만톤이나 되는 가공할 만한 양으로 배양돼왔다는 사실을 처음 공개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소련붕괴후 돈이 궁했던 시베리아의 세균전 연구소가 북한과 이란.이라크에 수백만달러의 돈을 받고 생물무기를 팔았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99년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국제미생물학회에 참석했다가 학회장에서 'Bioterrorism(생물무기테러)' 란 심포지엄에 참가할 기회를 가졌다.

올해 올림픽을 개최한 호주가 당시 선수들에 대한 생물무기 테러에 대비하기 위해 각계의 전문가들을 초빙해 마련한 자리였다.

알다시피 72년 뮌헨올림픽 때 이스라엘 선수들이 아랍권 게릴라들의 총격을 받고 사망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알리베크대령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북한에 옛 소련의 생물무기를 판 것이 사실이냐고 물어봤다. 그는 명확하게 사실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탄저병 세균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수년전 한국 국방부의 간부가 자신을 직접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털어놨다.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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