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바이러스와 반세기 (4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40. 일본 박사의 충격 고백

가사하라박사는 작은 체구에 머리가 희끗한 모습이었으며 어딘지 모르게 수심이 가득했다. 일본뇌염 바이러스의 세계최초 분리란 의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음에도 세균전의 주역이란 그림자가 전쟁이 끝난 지 35년이 흘렀음에도 남아 있었음이 역력했다. 나는 그에게 가볍게 인사말을 건넸으나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앉아 있기만 했다.

우리의 만남을 주선해준 기타사도연구소 마키노박사가 옛날 이야기를 꺼내가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려고 애썼으나 어색한 침묵이 수 분 이상 지속됐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꺼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 봤지만 진드기나 벼룩에선 바이러스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원숭이에게 진드기 분말을 직접 주사하는 실험에서도 감염되지 않았습니다" 가사하라박사가 유행성 출혈열이 진드기를 통해 감염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그랬더니 그는 각오를 한듯 침묵을 깨고 내게 뜻밖의 이야길 털어놨다. 요지인즉 자신이 발표했던 원숭이 실험은 사실 원숭이가 아니라 사람이었으며 진드기도 깨끗이 소독하지 않고 주입했으므로 결과가 잘못 나왔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진드기에 쥐의 소변이 묻어있게 되면 당연히 소변 속의 바이러스가 진드기와 함께 주입돼 감염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드기가 사람을 물어 진드기 체내에 있던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전염된다는 자신의 주장은 틀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731부대에서의 인체실험을 위장하기 위해 실험결과를 왜곡했다는 고백이었다. 그는 내게 기회가 되면 자신을 대신해 국제학회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혀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실시했느냐며 물어봤으나 답변을 회피했다.

잠시 후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학자로써 최소한의 고백만 한 셈이다. 이후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을 듣지 못했다.

한편으론 평생 은둔생활을 해야하는 그가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어찌보면 그도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나는 세균전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세계 각국의 세균전 관련 자료를 모았고 한탄바이러스가 세균전에 악용될 가능성도 생각해봤다.

1983년 소련군 조종사가 당시로선 최신식인 미그23기를 몰고 일본 홋카이도에 망명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나는 미국 메릴랜드주 미육군의학연구소를 방문 중이었는데 어느날 사령관인 바퀴스트대령이 나를 불렀다.

내용인즉 어떤 사람의 혈청을 1㏄주면서 한탄바이러스가 있는지 확인해달라는 것이었다. 조사해봤더니 한탄바이러스 항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중에 듣고 보니 그 혈청은 바로 미그기를 몰고온 소련군 조종사의 것이었다. 미군으로선 소련에서 세균전에 대비해 한탄바이러스를 분리해놓고 조종사 등 감염되기 쉬운 군인들에게 예방접종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의심한 것이었다.

1989년 나는 바퀴스트대령으로부터 소련이 비밀리에 세균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증거를 포착했다는 소릴 들었다.

미국의 첩보위성이 모스크바 북쪽에 위치한 비밀연구소에서 세균무기 개발현장을 촬영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실험실에 놓인 균의 시약과 라벨까지 판독할 정도라하지 않는가.

미국이 겉으론 자유분방하고 낙천적인 나라로 보이지만 속으론 모든 가능성에 일일이 대비하고 있는 무서운 국가란 생각이 들었다. 하긴 내가 생각해봐도 세균전은 가공할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통조림 고기가 썩을 때 발생하는 보툴리눔 독소는 단 1그램만 있어도 1백만명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이호왕 <학술원 회장>

정리=홍혜걸 의학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