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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페인’의 반면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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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나중에 알게 됐지만 실용을 중시하는 미국에선 1시간 거리의 노선에는 말 그대로 셔틀버스 같은 비행기가 많았다. 내려달라고 할 순 없고, 눈앞에 앉아 있는 기장에게 안전하냐고 물어보자 프로펠러기여서 엔진이 꺼져도 착륙을 시도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비행기가 낙엽처럼 출렁거릴 때마다 기분이 오싹했다. 마음을 졸이는 사이 비행기는 마천루 위를 날아 워싱턴에 도착했다.

이런 기억을 떠올리는 사이 일본항공(JAL) 비행기는 사뿐히 하네다 공항을 이륙했다. 조종 기술이 좋아서인지 마치 새 위에 올라탄 것처럼 부드럽게 떠올랐다. 창밖으로 도쿄만(灣)의 해안을 따라 바둑판처럼 정돈된 공장들이 옅은 연기를 뿜고 있었다. 기술입국으로 일본을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만들어낸 공장들이다. 흠잡을 데가 없을 때까지 다듬고 또 다듬는 ‘모노즈쿠리(物づくり·만들기)’의 전통이 넘쳐흐르는 곳들이다.

그러나 텅텅 빈 비행기처럼 일본이 예전만 못하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삼성전자가 2001년 처음으로 영업이익 규모에서 소니를 제쳤을 때 일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건 ‘일본병’의 전조였다. 지난달 파산한 국적기는 고객이 줄어도 큰 비행기를 유지하고, 소니는 삼성전자와 애플에 번번이 밀리고 있다. 품질 관리에 구멍이 뚫린 도요타자동차는 중국·인도·한국 기업과의 가격 경쟁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의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는 일본이 심한 충격을 받아 말도 못 꺼내고 있는 분야다. 일본은 전기전자나 자동차와 같은 범용기술의 격차는 좁혀졌지만 고도 기술은 일본이 우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을 고쳐먹고 있다. 원전 분야 기업들과 경제산업성은 한국 원전은 가격 경쟁력뿐 아니라 기술력도 뛰어나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고 최근 만난 한 일본 기자가 털어놓았다.

지난해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일본 경제의 고통을 ‘저페인’이라고 표현했다. 버블경제의 추억에 사로잡혀 현실에 안주하고 기술력에 자만한 결과 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의미다. 일본 기업들은 이제 한국 기업들에게 ‘교사’에서 ‘반면교사’로 거듭나고 있다. 도요타 파동을 지켜본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은 “품질이 최고의 목표”라며 빠르게 반응했다. 삼성전자 전문가인 야나기마치 이사오 게이오대 교수는 “글로벌 경영은 누구에게나 리스크”라고 지적했다. 일본 기업들의 고통은 글로벌화에 성공한 일부 한국 기업들에게 생생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김동호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