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남북] 수화로 만난 형제의 50년 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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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준응아, 이 녀석 왜 이렇게 늙었냐. "

"(수화로)형님, 왜 이제 왔어요. 보고싶었어요. "

"미안하다. 너 말 못하고, 못 듣는 것만큼은 내가 고쳐주고 싶었는데…. "

30일 오후 서울 반포 센트럴시티 남북 이산가족 상봉장. 평양외국어대 연구사인 임순응(林舜應.66)씨와 동생 준응(俊應.65.농아.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씨 형제가 5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마주앉았다. 남쪽의 여동생 순자(順子.55)씨도 배석했다.

형제의 대화는 준응씨가 순자씨를 통해 수화나 볼펜으로 종이에 적어 순응씨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북한의 유명한 외국어 연구자가 돼 나타난 형과,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동생은 수화(手話)와 필담(筆談)으로 가슴 속에 켜켜이 쌓아두었던 한을 한올한올 풀어냈다.

"이제 나타나 면목이 없구나. 형이랍시고 너한테 해준 게 아무 것도 없는데…. "

"형님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얼마나 행복한데요. 어머니가 미싱기술을 배우도록 도와줘 지금껏 잘 살았어요. 지금도 큰 회사에서 전기모터 기술자로 일하고 있어요. "

순응씨는 또 순자씨의 손을 꼭 잡고 조심스럽게 "부모님은 어떻게 되셨느냐" 고 물었다.

"아버지는 40년 전 돌아가시고 엄마는 1987년에 돌아가셨어요. 엄마가 오빠 보고싶다며 죽을 때도 눈을 못 감으셨어요. "

"내가 불효자식이다. " (울음)

준응씨는 네살 때 동네 원두막에서 혼자 놀다 남들이 버린 참외껍질을 먹고 체한 뒤 열병이 나면서 장애가 시작됐다.

용하다는 약을 지어먹인 게 오히려 화근이었다. 아홉살부터 완전히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됐다.

둘은 12형제.자매 중 셋째.넷째였고 한살 터울이어서 매일 싸우면서 정도 깊어졌다. 이들은 인근 냇가에서 멱을 감으며 뛰어놀았다고 한다. 순자씨는 11번째였다.

50년 서울공업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순응씨는 학교 간다며 집을 나간 뒤 영영 소식이 끊겼었다.

"준응이 니 결혼은 했냐. "

"그럼요. 애가 다섯이나 돼요. 듣지 못하는 집사람과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요. 집사람이 오늘 나가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해달래요. 형님한테 따뜻한 밥 한그릇 해주고 싶다고 했는데…. 형 기억나요. 우리가 텃밭에 거름 주던 거요. "

준응씨는 흐르는 눈물 속에서도 마냥 행복한 표정이었다. 반면 형은 안쓰러운 듯 연신 준응씨의 뺨을 어루만졌다.

눈물, 손짓, 그리고 펜이 형제간에 쌓였던 50년 분단의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하재식 기자

사진=김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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