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배 니는 빙신처럼 왜 얻어맞고 다니노?”
연극 ‘늙은 자전거’(사진·안경모연출)는 할아버지와 손자간의 이야기다. 따스한 정, 그런 거 없다. 악다구니처럼 살아가는 둘의 처절한 일상만이 징글징글 넘친다. 둘은 사실 초면이나 진배 없다. 할아버지는 큰 상점을 운영했는데, 큰아들이 그걸 말아먹어서 부자는 의절한 상태다. 낡은 자전거에 온갖 잡동사니를 가득 싣고서 시골 장터를 떠돌아다니는 할아버지 강만(이도경·최연식 분) 앞에 어느 날 어린애가 툭 떨어진다. 의절한 아들이 불량배들과 싸움을 하다 객사를 했고, 그 속 썩이는 아들의 아들인, 즉 손자 풍도(이지현 분)가 나타난 것. 면사무소 복지과 직원은 “할아버지에게 양육권이 있다”란 얘기를 건넨다. 손자를 처음 본 할아버지의 말. “내가 와 이 아를 맡아 기르노? 생전 보도 듣도 못한 아를?”
매몰찬 할아버지와 천방지축 손자가 함께 있으니 얼마나 사건사고가 많겠는가. 연극은 그토록 머리 끄덩이 잡고 싸우던 둘이 조금씩 살가워지는 광경을 하나씩 포착해간다. 싸움이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달으려는 찰나, 무대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암전된다. 그게 재미다. 마치 TV 연속극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을 마지막에 배치시켜, 다음 회를 보고 싶게끔 만드는 방법과 유사하다고 해야 할까. 실존이니 철학이니 같은 어려운 말 쓰지 않고, 꿈틀대는 일상 용어를 날 것 그대로 쓰면서도 곱씹는 맛을 전해주는 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다. 대본은 ‘불 좀 꺼주세요’ ‘용띠 위에 개띠’의 이만희 극작가가 썼다.
어느 날 문득, 손자는 묻는다. “할배 니는 뭐가 제일 무섭노?” 할아버지는 답한다. “정 드는 거.” 그게 무슨 뜻인지 누군들 모르랴. 극 막판, 정작 정이 들어 콧등이 시큰해지는 건 관객이다. ‘엄마’를 담보로 어설픈 신파가 판을 치는 요즘, 진짜 가족의 정을 되돌아보게 하는 연극이다.
▶연극 ‘늙은 자전거’=오픈 런, 대학로 이랑 씨어터, 3만5000원, 02-766-1717.
최민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