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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연극 ‘늙은 자전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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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할배 니는 빙신처럼 왜 얻어맞고 다니노?”

세상에, 이런 버르장머리라니. 이런 말을 여덟 살짜리 꼬마가 한다면 믿겠는가. 그것도 친할아버지에게. 반말은 예사요, 욕지거리가 부지기수다. 게다가 “할배 니는 의욕이 너무 없다”라며 훈계까지 한다.

연극 ‘늙은 자전거’(사진·안경모연출)는 할아버지와 손자간의 이야기다. 따스한 정, 그런 거 없다. 악다구니처럼 살아가는 둘의 처절한 일상만이 징글징글 넘친다. 둘은 사실 초면이나 진배 없다. 할아버지는 큰 상점을 운영했는데, 큰아들이 그걸 말아먹어서 부자는 의절한 상태다. 낡은 자전거에 온갖 잡동사니를 가득 싣고서 시골 장터를 떠돌아다니는 할아버지 강만(이도경·최연식 분) 앞에 어느 날 어린애가 툭 떨어진다. 의절한 아들이 불량배들과 싸움을 하다 객사를 했고, 그 속 썩이는 아들의 아들인, 즉 손자 풍도(이지현 분)가 나타난 것. 면사무소 복지과 직원은 “할아버지에게 양육권이 있다”란 얘기를 건넨다. 손자를 처음 본 할아버지의 말. “내가 와 이 아를 맡아 기르노? 생전 보도 듣도 못한 아를?”

매몰찬 할아버지와 천방지축 손자가 함께 있으니 얼마나 사건사고가 많겠는가. 연극은 그토록 머리 끄덩이 잡고 싸우던 둘이 조금씩 살가워지는 광경을 하나씩 포착해간다. 싸움이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달으려는 찰나, 무대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암전된다. 그게 재미다. 마치 TV 연속극에서 가장 강렬한 순간을 마지막에 배치시켜, 다음 회를 보고 싶게끔 만드는 방법과 유사하다고 해야 할까. 실존이니 철학이니 같은 어려운 말 쓰지 않고, 꿈틀대는 일상 용어를 날 것 그대로 쓰면서도 곱씹는 맛을 전해주는 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다. 대본은 ‘불 좀 꺼주세요’ ‘용띠 위에 개띠’의 이만희 극작가가 썼다.

어느 날 문득, 손자는 묻는다. “할배 니는 뭐가 제일 무섭노?” 할아버지는 답한다. “정 드는 거.” 그게 무슨 뜻인지 누군들 모르랴. 극 막판, 정작 정이 들어 콧등이 시큰해지는 건 관객이다. ‘엄마’를 담보로 어설픈 신파가 판을 치는 요즘, 진짜 가족의 정을 되돌아보게 하는 연극이다.

▶연극 ‘늙은 자전거’=오픈 런, 대학로 이랑 씨어터, 3만5000원, 02-766-1717.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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