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취재일기] 소주값 담합 과징금 272억 어정쩡한 결말 … 남은 숙제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누구의 말일까. 주류업계를 관장하는 국세청 공무원일까. 아니다. 소주업계의 공식 코멘트다. 업계가 정부 규제의 당위성을 적극 홍보하다니.

지난해 ‘국세청 그림 로비’로 한참 시끄러웠을 때다. 관련자인 모 국장은 당시 국세청으로부터 S사 사장 자리를 제의받았다고 한다. 주류납세 병마개를 독과점으로 만드는 이 회사는 사실 주류회사들 거다. 그런데 어떻게 사장을 국세청 맘대로 정하는 걸까. 답은 규제에 있다. 국세청이 인허가권을 바탕으로 주류업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으니 사장 인사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3일 공정위는 소주업계의 가격 담합이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과징금은 당초 통보했던 금액(2263억원)의 12% 수준인 272억원으로 낮췄다. 제재 대상 11개 업체 가운데 1위인 진로가 166억7800만원으로 가장 많다. 이어 무학 26억2700만원, 대선주조 23억8000만원, 보해양조 18억7700만원 등의 순이다.

공정위는 업계가 물가 안정에 노력했다는 점을 감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주 가격을 통제했던 국세청의 행정 지도가 아무래도 걸렸던 모양이다. 공정위의 한 관계자는 “주세법에 따른 국세청 행정 지도의 문제점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고 했다. 다만 4일의 공식 브리핑에선 이에 대한 입장 표명 자체를 유보했다.

공정위가 타 부처의 경쟁제한적 규제에 이렇게 미지근하면 결국 소비자만 골탕 먹는다. 1999년 공정위는 ‘카르텔일괄정리법’을 만들어 타 부처의 규제를 무더기로 청소한 적이 있다. 그때 사라진 게 막걸리 지역독점 판매제였다. 요즘의 막걸리 붐도 그 덕을 봤다. 공정위가 그런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는 데 ‘전투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시장경제의 파수꾼’으로 인정받기 힘들다.

업계는 또 뭔가. 그냥도 마시고, 섞어도 마시며, 그렇게 팔아줬는데, 규제에 안주하다 보니 글로벌 브랜드 하나 못 만들었다. 그저 소주 아니면 맥주다. 옛날보단 다양해졌지만, 술집에서 아무거나 시켜도 큰 차이가 없다. 앞으로 중·일과 자유무역협정(FTA)이 이뤄지면 더 좋은 가격과 품질의 고량주·사케가 쏟아져 들어올 수 있다. 그때도 국세청에 달려가 규제를 해달라고 할 텐가. 이번 사건은 국세청·공정위·업계 모두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서경호 경제부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