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두만강 대탐사] 13. 강은 대륙을 열고 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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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13. 북한 아낙의 쓸쓸한 뒷모습

이번 우리 일행의 국경 답사에서 나는 세 사람의 잊혀지지 않는 북한 여성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리고 본명을 밝힐 수 없는 20대의 여성과는 호젓한 장소에서 꽤 오랫동안 그녀의 신상문제에 대한 속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갑작스런 폭우로 범람했던 압록강 물 너울을 사이에 두고 나누었던 사십대 여성과의 짧은 대화는 이미 유홍준 교수의 답사기(중앙일보 9월 22일자 57, 58면)에 간략하게 소개됐다.

대안(對岸)에서 세족(洗足)을 하던 유교수와 대화를 나눈 북한여성은 강가에서 멱을 감고 있는 발가벗은 아이들 곁에서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빨래터로 나온 그녀의 행색은 먼 빛으로도 입성은 남루하고 모습은 초췌하였다.강 건너 마을로 놀러가도 되겠느냐는 유교수의 느닷없는 질문에 그녀는 얼른 방망이질을 멈추고 먼 느낌이 들도록 손사래를 쳤다.

유교수와 나누었던 대화 내용보다 그녀가 흔들었던 과장된 손사래에 나는 왠지 가슴 뭉클했었고,내 머릿 속에 지워지지 않는 환영으로 남아있다.

그녀가 보여준 손사래는,강을 건너오는 것이 즉흥적으로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손쉬운 모험이 아니라는 어머니로서의 애정과 경고의 뜻이 담겨 있는 듯했고,건너온다 하더라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접대와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스러움이 깔려 있었다.

그 두 가지 인상을 한꺼번에 받은 것에는 내가 가진 북한 여성들에 대한 선입감이 작용했을 수도 있겠지만,나중에는 겨울에 강이 얼게 되었을 때 놀러 오라는 것으로 결론에 이른 그 짧았던 대화의 현실적 결론은 뜻밖에도 두만강 유역인 옌지(延吉)시에서 얻어 낼 수 있었다.

옌지 시가지에는 상설시장인 시스창(西市場)이 있다.옌지시를 방문할 때마다 놓치지 않고 둘러보는 이 시장의 상가건물 1층 안 쪽으로 들어가면,북한을 드나드는 중국의 보따리 상인들이 들여온 갖가지 일용품들만 취합해서 팔고 있는 좌판들이 늘어서 있다.북한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교묘하게 모사(模寫)한 것들도 이 곳에 가면 입맛대로 살 수 있다.

그 날 오후,다른 일행들이 고서점이나 골동품 상점으로 흩어진 사이 나는 정재왈·장문기 두 기자와 함께 시스창을 둘러보기로 하였다.같은 상가의 2층으로 가면,북한으로 드나드는 보따리 상인들이나 중국을 방문한 북한 여행객들만 단골로 이용하는 옷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이른바 북한전용 옷가게인 셈이다.마침 철시를 하려는 해그름 녘이어서 상가 복도는 한산했다.그런 가운데 한 옷가게 앞에서 눈요기만 하고 있는 40대 여성이 시선에 들어왔다.

북한에서 온 여성이라는 것을 직감한 나는 역시 그 가게 좌판으로 다가가 이것저것 옷가지를 고르는 척 하였다.

그때였다.좌판 앞을 떠나지 않고 있던 그녀가 뜻밖에도 먼저 말을 걸어왔다.옷을 사려면,흰색이나 노란색 같은 밝은 색깔을 선택하지 말고 어두운 색깔을 선택하라는 한마디 조언이었다.

먼저 말을 걸어 왔으므로 나는 놓칠세라 대뜸 왜 그래야 하느냐고 되물었다.그녀는 급기야 말문을 닫아 버리고 머쓱하게 서 있기만 했다.나는 두 번이나 똑 같은 말을 되물었다.

그녀가 해야할 대답을 속시원하게 대신해준 사람은 우리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옷가게의 젊은 여주인이었다.옷을 세탁해야할 비누용품이 북한에는 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웃 사람의 아픈 가슴에 무작정 송곳을 들이댄 아연한 기분이었다.압록강 빨래터에서 먼 빛으로 보았던 아낙네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던 그녀와 그 남편의 따뜻한 겨울을 위해 나는 자주 빨지 않아도 될 어두운 색깔로 제조된 두 벌의 내복을 사서 그녀에게 선물했다.그 제서야 나는 그 가게의 좌판에 널린 옷들이 모두 어두운 색깔 일색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뱀의 꼬리를 따라 올라가면,그 머리에 도달 할 수 있다는 속담이 있다.굳이 그들과 이마를 마주하고 그 궁핍의 진상들을 낱낱이 캐물어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호비칼로 도려낼 까닭이 없다.압록강가에 살고 있는 여인이 보여준 손사래에서도 얼마든지 그들의 진상을 알아챌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들의 답사 일정이 거의 소진되어 갈 무렵,나는 어떤 도시에서 북한에서 온 20대의 여성과 호젓한 장소에서 오랜 동안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그녀의 이름과 고향을 지면에 공개 할 수 없음을 양해해 주기 바라면서….

그녀는 압록강이 바라보이는 북한의 마을에서 다섯 남매의 막내로 살았다.중국의 옌지에서 살고 있는 조선족 청년이 몇 번인가 그녀가 살고 있는 마을을 방문하게 된 것이 지금의 그녀를 이 낯선 도시에서 무국적자로 숨어살게 말들었다.

외양이 매우 곱상스럽고 다소곳한 그녀는 그 조선족 청년과 자주 만나게 됨으로써 서로가 시선에 끌리게 되었고,급기야는 장래까지 약속하게 되었다.그러나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던 그 청년과 오랜 동안 소식이 끓어지고 말았다.

생긴 외양과 달리 아금받고 강단이 있는 그녀는 친구 한 사람과 동행으로 무작정 강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옌지로 찾아가 그 청년과 해우 하였다.

두 사람은 곧장 시부모를 모시는 신접살림을 차렸다.그러나 꿀단지 같았던 신혼살림은 1년만에 전혀 예기치 않았던 파탄과 만나고 말았다.그녀의 거처는 느닷없이 한 촌락의 농가로 옮겨졌고,거기에는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이 아닌 몽매에도 낯선 청년이 또 다른 신방을 차려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집에서 견뎌낸 일주일은 지옥과 같았지만,그 낯선 청년에게 결단코 곁을 준 적은 없었다.그녀를 달래고 문지르고 혹은 협박하는데 지친 농가의 어른들은 비로소 그녀가 금전에 팔려 왔다는 것을 실토하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이 왜 이 농가에 오게되었는가를 그때서야 알아차렸을 정도로 순진한 여자였다.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챈 농가에서는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남편에 대한 배신감은 그녀의 발길을 다시 옌지로 돌려세우지는 않았다.무국적자이고 쫓기는 신세가 된 그녀가 갈 곳은 은신처가 수월한 도시밖에 없었다.그리고 지금 그녀는 시골티를 완전히 벗고 세련된 20대의 여자로 그 도시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를 깡그리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이젠 세상 물정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가늠 할 줄 알며,강을 건넜을 당시보다 몰라보게 세련된 지금의 모습을 옌지의 남편에게 과시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를 수 없었다.

그녀는 잔뜩 멋을 부리고 선물까지 준비해서 옌지의 시댁을 방문하게 된다.그녀의 놀라운 모습을 발견한 시부모와 남편은 턱이라도 떨어진 듯 말문이 열리지 않았고,조심스럽게 다시 신접살림 차리기를 종용하거나 요청하였다.

그런데 그 한마디 말은 실제로 그녀가 옌지를 다시 찾아갔던 숨은 저의였다.그는 단호하고도 냉담하게 그리고 한 마디로 그들의 뜻을 거절하고 단숨에 도시로 돌아와 버렸다.

중국을 향하여 강을 건너온 이후 지금까지 3년을 살아올 동안 그때처럼 속시원했었던 적은 없었다며 그녀는 쓸쓸하게 웃음 지었다.

그녀의 삶에는 그러나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2년 안에 무국적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이고,그후 3년 안에 한국으로 가는 일이었다.그 곱상스런 떠돌이의 최종 정착지로 결심한 곳은 한국이었다.

백두에서 황해로 흘러드는 압록강,다시 백두에서 동해를 향하여 유장한 몸트림으로 흘러가던 두만강의 야경을 그려보면서 나는 이 밤 잠들기를 재촉한다.

그러나 압록강변 자갈밭으로 자지러지던 빨래 방망이 소리,허벅지까지 차 오르는 물길을 비켜 몽당치마를 걷어올리며 허위단심 강을 건넜던 그녀의 머리 위로 높다랗게 걸린 채 쉼 없이 돌아가던 붉고 푸른 전등의 불빛,남 쪽 사람이 건네준 내복 선물을 소중하게 안고 황망히 돌아서던 아낙네의 뒷모습이 시선에 아른거려 잠을 방해한다.

우리는 언제쯤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그리고 두려움 없는 가슴으로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김주영<소설가>

<답사단>

◇ 국내 : 신경림(시인), 원종관(강원대 교수.지질학), 김주영(소설가), 유홍준(영남대 교수.미술사), 안병욱(가톨릭대 교수.한국사), 승효상(건축가), 이종구(화가), 송기호(서울대 교수.발해사), 김귀옥(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원.사회학), 여호규(전 국방군사연구소 연구원.고구려사)

◇ 현지 : 유연산(중국 옌볜작가), 안화춘(옌볜 사회과학원 연구원.독립운동사)

◇ 중앙일보 : 장문기(사진부 기자), 정재왈(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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