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업체, 장비 팔고 AS 빌미 기밀 빼 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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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반도체 핵심 기술을 하이닉스에 유출한 것은 협력업체 AMK의 직원들이었다. AMK는 미국에 본사를 둔 세계 1위 반도체 장비업체 AMAT의 한국법인이다. 이 회사는 삼성전자는 물론 하이닉스와도 장비를 거래하고 있다. 장비업체가 경쟁 관계에 있는 두 거래 기업의 중간에서 기술을 유출하는 ‘중개’ 역할을 한 셈이다.

검찰에 따르면 AMAT의 부사장(AMK 전 대표) 곽모씨는 한국법인 팀장 김모씨 등 직원들과 짜고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의 제작 공정 등을 담은 기술 13건을 하이닉스에 넘겼다. 곽씨는 이 업체의 한국법인 대표를 지내다 본사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검찰은 기술 유출의 대가로 금품이 오갔는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기술을 AMK에 넘긴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삼성전자 남모 과장과 기술을 넘겨받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하이닉스 한모 본부장 모두 검찰 조사에서 “기술 유출의 대가로 돈을 주고받은 사실은 없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이번 기술 유출이 ‘개인’이 아니라 ‘조직’ 차원에서 벌어진 일로 보고 있다. 장비를 구매하는 하이닉스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AMK에 기술 유출을 요청했고, AMK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동부지검 변찬우 차장검사는 “AMK 대표가 왜 이렇게 ‘실적’이 없냐고 직원을 자주 채근했다는 진술이 있다”고 말했다. 검찰 조사 결과 하이닉스의 한 전무는 하이닉스에 납품하는 업체들로 구성된 ‘H회의’를 통해 핵심 기술을 취득한 것으로 드러났다.

오랫동안 거래해 온 협력업체라는 점이 삼성전자의 보안의식을 느슨하게 했다. AMK의 직원들은 장비 설치와 애프터서비스(AS) 등 관리를 위해 삼성전자 공장에 수시로 드나들 수 있었다. 비밀 문서를 몰래 갖고 나오거나 친분이 있는 직원에게 질문해 정보를 캐내는 방법으로 기밀을 빼돌렸다고 한다. 검찰 관계자는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경쟁사에는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지만 협력 관계인 장비업체는 비밀에 쉽게 접근해 핵심 기술을 광범위하게 수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경쟁사에 핵심 기술이 넘어감으로써 삼성전자가 입게 되는 직접 피해만 최소 수천억원”이라고 설명했다.

이정봉·심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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