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김경자 '사라져 가는 것 중에. 4 한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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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암갈색 닥나무 물에 축여 껍질 벗겨

그늘진 삶 씻어내고 넋을 쏟아 삶아낸다

강인한 힘이 되도록 방망이로 나를 친다

아기가 젖을 빨듯 힘차게 먹을 빠는

조선종이 천 년 목숨 한 획을 그어 보라

먹물은 번짐이 없이 겸허로이 빛나리

공들인 결정체. 선비의 숨소리

찢어도 늘어날 뿐 갈라지지 않는 끈기

시조와 견줄 만하게 짝을 이뤄 향기롭다

- 김경자(61) '사라져 가는 것 중에. 4 한지'

천 년을 넘어서도 끄떡없이 살아 숨쉬는 조선종이가 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랜 목판활자본도 우리나라의 것이고 한지(韓紙)의 수명만큼 이 나라의 시의 뿌리인 시조도 더 높은 숨결로 하늘을 떠받쳐 오고 있다. 한지는 '사라져 가는 것' 이 아니지만 이 시인은 옛날 선비들이 붓과 먹물로 글농사를 짓던 그 문화를 그리는 것이리라. 시조의 정신에 묵향이 듬뿍 밴 한지 한 장이 빛을 뿜는다.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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