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질서냐 혼란이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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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우그룹이 끝내 해체위기로 몰렸고 현대건설이 부도를 연장해가며 마지막 연명을 하고 있다.

개발독재시대를 리드하며 성장 한국의 신화를 남겼던 두 기업의 스산한 퇴장을 보면서 한 시대의 막이 내려진다는 감회가 들지 않을 수 없다.

'하면 된다' 는 불도저식 경영철학과 확장일로의 공격경영이라는 산업화시대의 모델이나 질서가 무너지고 정보화시대의 새로운 경영방식이 요청되는 한 시대의 분수령에 우리가 서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 무너져가는 舊질서 舊체계

그러나 문제는 정보화시대의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경영모델을 창출할 벤처기업마저 1년이 채 안된 시점에서 주저앉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질서와 구체제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체계의 새로운 질서가 서서히 자리잡아야 혼란속에서도 경제와 사회가 제자리를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돌아가는 사정은 구질서와 새 체계가 뒤범벅이 돼 동반 추락을 하고 있으니 한국경제의 위기국면에 사회적 불안심리까지 겹치는 것이다.

경제뿐인가. 냉전체제의 해체라는 DJ정부의 대북정책 또한 과속추진과 일방적 시혜라는 보수층의 반발심리에 밀려 국민들은 사상적 갈등을 겪고 있다.

화해와 협력에는 동의하면서도 급속한 남북접근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게 아닌가 하는 주저와 공포가 생겨나는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라 해도 좋고 새로운 남북체계와 질서 편입에 대한 회의와 비판일 수도 있다.

유사한 갈등과 혼란은 노사관계와 의약분업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낡은 의료체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의료체계를 만들자는 의료개혁이 새로운 개혁세력에 밀려 새 질서 정립을 향한 어떤 합의도 이루지 못한 채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다.

한때 DJ의 지지기반이기도 했던 노조단체가 경제위기 국면을 맞아 이제 부메랑이 되어 DJ정부와 맞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려갈 것이다.

단순히 경제위기만이 아니라 구질서와 새 질서, 구체계와 새 체계가 맞서고 충돌하는 혼란과 갈등이 DJ정부 후반기에 몰아닥칠 위기증후군이다.

민주사회에서 적절한 질서와 혼란은 사회를 긴장시키면서 역동화하는 기능을 한다. 미국 경제학자 레스터 서로는 '지식의 지배(Building Wealth)' 라는 저술에서 두가지 사례를 들고 있다.

왜 15세기 강대국 중국은 산업화를 이루지 못했는가. 당시 중국은 세계 최대의 철강 생산국이었고 화약과 대포.나침반과 방향타, 지식정보를 전파할 종이와 활자.인쇄기까지 있는 선진기술국이었다.

여기에 십진법과 음수, 0의 개념까지 활용하는 수학의 발전도 있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는 그 원인을 당시 중국인의 철저한 질서의식 때문이라고 했다. 새것을 거부하고 과거를 지키기 위한 질서의식이 혼란스런 새것에 대한 창의력과 모험을 거부하고 탄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19세기 러시아는 혼란 속에서 창의력이 융성했던 시기다. 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체호프 같은 대문호가 등장하고 스트라빈스키.차이코프스키.칸딘스키 등 음악.미술이 만개(滿開)한 시대다. 노벨화학상의 오스트왈드, 원소 주기율표의 멘델레예프, 조건반사의 파블로프가 등장한 시기다.

창의성은 혼란 속에서 빛난다는 사실을 이 시대 러시아는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나. 혼란은 혼돈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러시아혁명이란 최악의 질서를 만들어냈다. 극도의 혼란은 최악의 나쁜 질서를 만들어낸다는 교훈이다.

*** 위기 직시해야 혼란 극복

60년대 군사정권 이후 5, 6공화국을 거쳐 양金 정부에 이른 지금 크게 보면 우리의 모든 질서는 권위주의 시대의 개발독재적 질서체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DJ집권 이래 구질서의 붕괴가 서서히 시작되면서 새 질서를 구축하기 전의 혼란이 오늘의 위기국면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미 DJ집권 전 구경제체제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가 있었지만 우리는 이를 단순히 외환위기로 축소해서 덮으려 했기 때문에 지금의 위기국면이 재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 위기국면을 단순히 기업퇴출을 둘러싼 일시적 혼란이나 노사갈등 수준으로 접근해선 안된다.

한 시대의 질서와 체계가 무너지고 새 질서 새 체계를 만들어내는 위기와 혼란의 한복판에 서있다는 비장한 인식과 이를 극복하려는 비상한 각오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

고칠 것은 과감히 고치고 지킬 것은 지키며 강한 질서를 되찾는 노력 없이는 우리는 혼란의 한가운데서 헤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DJ정부는 이 위기를 너무 감지 못하고 있거나 과소평가하고 있지 않은가.

권영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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