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선택] 선거인단 제도 허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제43대 미국 대통령 선거가 당선자를 결정하지 못한 채 사상 초유의 재검표 사태로 간 가장 큰 이유는 선거인단 제도의 허점 때문이다.

이 제도의 특징은 '승자독점' 이다. 투표장에 들어가면 유권자들은 각 대선후보가 내세운 선거인단에게 투표한다. 유권자 표가 한 표라도 더 많으면 그 주의 선거인단 전체를 독식한다. 다른 나라에선 유례를 찾기 힘든 제도다.

이번 선거에서 문제가 된 지역은 플로리다주였다. 이곳 선거인단은 25명인데 플로리다 개표가 끝나기 전까지 민주당 앨 고어는 2백49명, 공화당 조지 W 부시는 2백46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한 상태였다.

따라서 누구든 플로리다 선거인단 25명만 확보하면 전체 선거인단의 과반수인 2백70명을 넘게 돼 무조건 대통령에 당선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두 후보는 플로리다주에서 사활을 걸고 싸웠다. 잠정 집계에 따르면 투표에 참가한 전체 유권자 약 5백90만명 중에서 부시는 2백90만9천여표를, 고어는 2백90만7천여표를 얻었다.

표 차이는 2천표도 안나지만 선거인단 제도의 특징상 부시가 플로리다 선거인단 25명을 모두 독식한다.

다시 말하면 세계 최대 권력이라는 미국 대통령 자리가 바로 플로리다의 이 1천몇백표에 의해 왔다갔다 했다는 뜻이다.

이 모순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번 대선 투표에서 고어 후보는 미 동부시간 8일 오전 9시 현재 미 대륙전역에서 4천8백42만여표를 얻었다. 투표자의 49%다. 반면 부시 후보는 4천8백22만여표를 득표했는데 48%다.

유권자 득표는 많이 하고도 선거인단 제도 때문에 지는 것이다. 떨어진 후보로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미국 역사상 이런 일은 몇차례 있었다. 1888년 공화당의 벤저민 해리슨 후보는 민주당의 클리블랜드 후보보다 유권자 지지율은 0.8%가 낮았지만 선거인단에선 큰 차이로 앞서 대통령이 됐다. 1876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누가 봐도 이상한 제도지만 미국은 이 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동안 크게 말썽이 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침내 2000년 첫 선거에서 우려하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미국이 현재와 같은 선거인단 제도를 시작한 1820년대엔 땅은 넓고 교통수단은 발달돼 있지 않아 일반 유권자들은 대통령 후보가 누군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선거인단제도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이제 재검토가 불가피할 것 같다.

김종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