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의 세상 바꿔보기] 유치원 공화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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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차례대로 질서있게 승차합시다. 조용히 합시다. 뛰지 맙시다…. 기차.지하철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소음들이다. 짜증스런 청각 공해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왜 저렇게 틀어대는지. 상부의 지시여서일까. 그래야 질서가 유지된다고 믿는 걸까. 시민을 어떻게 보고 이런 소릴 해대는 건지. 우리가 유치원 아이냐? 은근히 화가 난다.

그 소리 들어도 싸지 뭘 그래? 공공장소에서 우리가 하는 짓거리를 못봐서 그래? 하긴 그렇다. 그래도 저렇게 떠들며 자랑까지 할거야 없지 않은가.

거리엔 현수막도 요란하다. 아주 현기증이 난다. 대청소의 달에서 종합토지세 납부의 달까지. 고지서를 발부했으면 됐지, 저런 광고는 왜 해? 그것도 다 돈인데. 정부의 과잉보호가 국민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

고속도로 휴게소도 마찬가지. "서울행 손님 빨리 승차…" 등 잡다한 안내방송에 정신이 산란하다. 10분 휴식이면 시간이 돼서 떠나면 그만이다.

미국에선 이 점이 철저하다. 못타는 건 손님 책임이다. 좀 매정한 생각도 들지만 손님의 자율성을 존중하자는 뜻이다. 제시간에 안오면 그 버스는 안타겠다는 선언이다. 그런 손님을 왜 기다려?

'환경을 깨끗이' '수돗물 아낍시다' - 이런 당연한 구호도 식상하지만 생각이 모자라는 구호까지, 시각공해도 만만찮다.

'버스 차선을 지킵시다' - 이걸 버스에 써 붙이고 다니는 무신경이라니! '버스 차선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래야 이치에 맞다. 설득력도 있고. 가정의 달도 웃기는 발상 아닌가.

'주말은 가족과 함께' - 이런 구호가 지금도 식당 벽에 붙어 있다'(주인이 알아서 한 게 아니다)'. 이게 사생활 침해라는 것쯤 알고나 있는지.

이쯤 되면 유치원 공화국이다. 외신기자들이 단골 메뉴로 꼬집는데도 할 말이 없다. 모든 게 '앞으로 나란히!' 다.

이번 퇴출기업 합동발표도 그 전형이다. 줄서! 너는 우로, 좌로, 너는 뒤로! - 그걸 지시하자니 또 위원회를 만든 모양이다. 생선가게 걱정이 또 재발한다.

'저 고양이는?' - 딱하게도 이게 국민정서다. '너는 꺼져!' - 당한 기업이 반발할 수밖에' 없다'. 은행도 장사인데 더 빌려줘 가망이 없다면 진작에 마감했으면 될 일 아닌가.

유치원 공화국의 백미는 소위 '자정 결의대회' 다. 일이 터지면 점잖은 사람들이 머리띠를 두르고 상사의 선창에 따라 결의를 다진다.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국민 눈엔 치졸하다 못해 한심하다.

며칠 전에도 우린 또 그런 꼴을 지켜봐야 했다. 그 시간에 일이나 옳게 할 것이지. 그런다고 나아지지도 않던데.

소위 상부지시라고 하달되는 공문 내용도 때론 치졸의 극이다. 자율도 없고 책임질 사람도 없다. 이념은 없고 보스만 있는 정당, 사장 말은 언제나 옳은 기업, 사회 모든 조직이 관리.통제.지시에 의해서 움직인다.

마침내 요즈음 우리 사회는 온통 대통령만 쳐다보고 앉아 있다. 국사를 논하는 국무회의도 크게 다르지 않다니, 그러고도 나라가 이 만큼이나 돌아가는 게 신기하다.

오랜 역사의 절대군주, 엄격한 가부장제, 군사통치, 그리고 우리 학교교육까지 충성.복종, 달달 외우고 따라야 하는 꼭두각시 행렬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 안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율성을 가르치지 않는다. 비판도, 반대도 없다. 무조건 따라야 한다. 대열을 벗어나면 끝장이다.

이런 제도나 관습은 국민을 바보로 만들어 끝내 발전에 장해요인으로 작용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훈련이 안되기 때문에 작은 변화에도 공황상태에 잘 빠진다.

경제가 좀 어려우면 당장 위기를 느껴 돈을 안쓰는 통에 시장을 얼어붙게 만든다. 호황이다 싶으면 그만 들떠 과소비로 살림이 거덜난다.

이런 사회환경에선 개성.독창.창의니 하는 건 아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당국에 부탁한다. 제발 그 쓸데없는 구호나 표어를 남발하지 말아 주십사고. 붙이는 것만으로 책임을 다하는 건 아니다. 효과는커녕 국민 총 바보로 만드는 짓이다. 세계 제일의 교육수준이다. 자율과 책임, 이게 헛구호가 되지 않도록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의례적인 구호는 없는지, 방송.현수막.벽보 등 모든 구석을 두루 살펴야겠다. 외국 사람이 비웃는 건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별 생각 없이 하고 있는 이런 일들이 몰고올 그 부작용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다.

이시형 <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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