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문의 새 길] 12. 시민연극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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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한국연극은 우리가 사는 사회와 동떨어져 있다. 연극을 보는 이들은 매우 적다. 중앙정부나 지방 자치단체의 문예지원금이 없이도 가능한 공연은 매우 드물다. 희곡을 읽는 독자들, 희곡 속 대사를 외워 말할 수 있는 이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도대체 무엇때문인가. 이는 무엇보다도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연극이 도시 속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사는 도시와 시민의 문제들을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사회를 지향하는 도시는 무엇보다도 생산하고 이득을 취하고 이를 위해서 경쟁하는 시장의 원리에 의해서 운영된다.

그리고 시장원리는 시민사회에서 생활의 원리로 작용한다. 오랜동안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연극은 이같은 거대한 도시와 물질문명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방식을 되묻지않으면 안된다.

도시에 거주하는 연극이란 무엇인가, 연극과 도시는 어떤 상관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 연극은 시민사회 속 시장 원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득과 경쟁의 원리를 벗어나 연극만이 지닌 고유한 공공성의 원리가 있는가 등을 스스로 물어야 한다.

연극의 관객들인 시민은 다양하다. 도시에서 자신을 숨긴 익명의 존재로서 바깥을 살펴보기도 하고, 유명(有名)의 존재로서 삶에 만족하기도 하고, 불만을 지닌 채 살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 전면에 나서서 자신들의 의견을 내세우는 여론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무관심과 관심, 이기심과 이타심, 개인적 정의와 사회적 정의 등이 섞여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뒤의 항목들이 앞의 것들을 앞지르지 못한다. 가족 이기주의가 사회적 윤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시민연극은 시민을 위한, 시민의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연극은 혈연과 부족의 윤리를 다룬 연극이 아니라, 도시에 사는 이들을 위한 사회적 도시윤리를 다루는 연극이다.

그렇다고 시민연극이 관객인 시민들에게 시민으로서의 규정된 삶을 강요한다는 뜻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시민연극은 밤의 부드러운 공간의 깊이가 아니라 낮이라는 시간의 길이 속에서 일하는 고통을 드러내며, 노래와 춤이 아니라 이성과 합리주의의 상징인 말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는 연극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 씌어진 희곡이다. 시민연극에서 인물들은 운문과 산문을 섞어 말한다. 노래와 춤이 아닌, 이들 말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며 제도의 억압 등에 의한 삶의 결핍을 숨기지 않고 보여준다.

서양연극에서 시민연극의 이념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이다. 이 희곡은 가족윤리와 도시윤리의 대립을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서양의 연극사는 가족윤리의 상징인 안티고네와 도시 윤리를 상징하는 크레온과의 끊임없는 충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혈통과 부족을 중시하는 가족의 윤리는 질서와 평등을 필요로 하는 도시 윤리와 반목한다. 서구 시민연극의 탄생은 가족문화에서 도시문화로의 고통스러운 전환과정에서 온 것이고, 등장인물들의 고통과 비극은 이 괴로운 투쟁을 끝까지 몰고 간 결과였다.

반면에 우리나라 근대극의 고전들은 대부분 동일한 문법과 법칙에 따른 가족주의를 내세웠다. 1970년대 이후 사회적 억압과 더불어 연극에서 가족윤리는 더욱 굳어졌다.

고통스러운 전환과정을 회피한 결과 시민연극이 지녀야 할 말의 역동성, 치밀한 논리, 정교한 극작술은 잊혀질 수 밖에 없었다.

한국연극은 나라 안팎에서 경쟁력이 없고, 우리나라 작가들이 쓴 희곡은 잘 읽혀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많다.

우리 학교의 국어시간, 말하기 시간에 희곡은 홀대받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 안의 말이 도시와 삶에 대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지 못한 탓이다. 읽고 기억해서 줄줄 말할 수 있는 주옥같은 대사도 없다.

이같은 경쟁력을 상실한 희곡과 그에 따른 희곡.연극의 홀대는 독자와 관객들이 이를 통해서 시민으로서 짊어져야 할 의무와 권리를 경험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런 탓으로 오늘날 우리들의 말과 글 생활은 거칠고 가난하기 이를 데 없다.

수사학은 원래 정치의 소산이다. 그러나 말로써 대중을 설득하고 이에 합당한 정책을 수행해야 하는 우리 정치가들의 말들은 공소하거나 천박하기 짝이 없다.

이처럼 제대로 된 말을 못한다는 것은 시민 사회에서 중요한 덕목인 타자와의 관계가 합리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우리나라의 중앙정부는 국립극단을, 각 지방자치 단체들은 대부분 시립극단을 갖고 있다. 국립극단을 포함해서 시립극단들은 시민연극의 개념과 실천방안을 연구해서 판을 다시 짜야 한다.

공교육을 담당하는 학교교육은 희곡을 읽고, 말들을 암기할 수 있도록 해서 근대적 가치들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 희곡작가들은 시민연극의 내용과 작법에 대한 연구, 극단은 공연장소와 시민이라는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포용하는 연극에 대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연극을 지원하는 정부의 적지 않은 예산도 시민연극에 관한 올바른 정책에 따라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시민연극론은 한국 근대연극의 구조적, 치명적 결함을 반성하고 새로운 모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유이며 실천론이다.

안치운 <연극평론가>

◇ 다음은 한국종교연구회 장석만 연구원의 '모더니티종교론' 입니다.

[시민연극론은…]

당대 시민사회의 윤리와 가치를 담고 있는 '살아있는 연극' 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지금 이 땅의 연극은 도시를 거점으로 하면서도 시민들의 생생한 삶을 드러내는 데 실패했고, 따라서 연극은 죽고 관객은 없다는 것이다.

시민연극론은 그 '죽은 연극' 을 회생시키기 위해 관계의 윤리,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치열한 삶의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생생한 말(언어)을 회복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 위해 공적자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 단체는 시민들의 삶을 반영한 새로운 연극 언어를 개발해야 하며, 제도권 교육에서는 희곡읽기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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