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휴! 이런 일 그만합시다

중앙일보

입력

관련사진

photo

월간중앙 심재철(52)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뚝심’을 지녔다. 그가 지나온 인생역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알 만한 사람들은 그의 삶을 ‘3전4기’로 표현하기도 한다.

연말마다 여야 전쟁… 예산 연중심사로 바꿔야 #정치인탐구 | 예산안 통과 강행한 심재철 국회예결위원장

학생운동을 하다 5년 수감, 출소 후 교사로 재직하다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퇴직, 방송기자로 진로를 바꾼 후 출근길 교통사고를 당해 3급 장애, 지팡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국회의원.

이 같은 그의 인생스토리가 ‘뚝심정치’를 펼치는 뿌리 아닐까? 그런 심 의원의 성품을 잘 알기에 동료, 선·후배 의원들이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는 그를 18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직에 앉혔는지도 모를 일이다.

예결위원장은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니다. 임기는 1년이지만, 이듬해 나라 살림을 심사하는 막중한 임무를 떠안는다. 그 임무 때문에 위원장은 원치 않는 욕을 먹기 일쑤다.

뜻대로 예산을 배정받지 못한 국회의원들은 위원장을 향해 알게 모르게 육두문자도 서슴지 않는다. 해마다 연말이 다가오면 연중행사처럼 벌어지는 예결위 회의장의 난장판이 올해도 어김없이 벌어졌다. 야당 의원들은 예결위 회의장을 점거했고, 데드라인을 넘긴 심 의원은 진땀을 뺐다.

몸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예결위원장으로서 사상 초유의 준예산 편성이라는 과오의 중심에 설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 의원은 막판 예결위 회의장 변경을 통해 예산안을 강행처리했다. 1월7일 국회 예결위원장실에서 만난 심 의원은 근황을 묻자, 제때 예산안을 처리하지 못한 데 따른 우려부터 쏟아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적어도 국정 파행은 막아야겠다는 뜻에서 처리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1월에는 (예산이) 반영되지 않으니 걱정스럽다.”책임감 강한 성격 때문일까? 예산안 처리가 완료됐건만, 여전히 심 의원은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듯했다.

- 올해 예산안 처리가 어렵게 매듭지어졌습니다.

“처리는 됐지요. 하지만 실제 국회에서 의결된 후 현장까지 (예산이) 내려가는 데 20일 정도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일러야 1월 하순이니 걱정되네요. 예를 들면 희망근로사업 등 정부가 하는 일자리사업의 계획이 늦춰지고, 그 부분이 고스란히 고용 통계에 반영되니 정부의 입장에서도 썩 유쾌하지는 않죠.”

- 위원장으로서 예산안 처리가 지연되면서 노심초사했을 텐데, 그때 심경이 어땠습니까?

“정말 긴장했어요. 굉장히 험악한 상황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하듯 예산을 처리했는데, 그것이 정상적인 처리 방법은 아니잖아요?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馬耳東風 야당에 ‘聲東擊西’로…

- 당초 12월2일과 9일로 예산안 처리 데드라인을 정했지만 뜻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부터 아예 (야당 의원들이) 예결위 회의장을 점거했기 때문에 처리할 수 없었어요. 자기들이 내세운 전제조건을 충족시키면 점거를 풀겠다고 했는데, 그 핵심이 4대강사업 예산이었잖아요? 4대강사업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조건을 내걸었어도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봅니다.”

- 말씀대로 4대강사업 예산이 이번 사태의 핵심이었는데, 일부 야당 의원들의 주장은 4대강사업 예산 때문에 복지예산이 축소됐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정치선동용 구호일 뿐입니다. 실제로 전체 재정지출 규모가 2.5% 늘어난 것에 비해 복지예산은 8% 정도 올랐어요. 3배가 넘죠. 4대강사업 때문에 복지가 줄었다는 것은 말이 안 돼요.”

- 그런 부분을 야당 측에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지 않습니까?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에요.”

- 결과적으로 단독 강행처리한 것에 대해 다수의 횡포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다수의 횡포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준예산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뿐이었어요. 회의장을 점거한 상태에서 정상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100% 불가능했지요.”

- 그렇지만 이번 예산안 처리를 놓고 유·무효 시비가 엇갈리고 있습니다.

“법률적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국회 사무처에 수석전문위원과 수석전문위원 산하 상임위별 조사관들이 있어요. 그분들과 논의한 결과 문제가 없는 것으로 확인하고 제3의 장소에서 처리한 것입니다.”

연초 국회 분위기는 냉랭하다. 여야의 첨예한 대립각은 좁혀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다가올 2월 국회는 일찌감치 지난해 연말 대치정국의 연장선상으로 예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관련사진

photo

“예결위원장 1년 더 하고 싶다”

- 예산안 처리 후폭풍이 당분간 지속될 듯합니다. 실마리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2월 국회가 열리면 자연스럽게 여야가 참여하되, 다만 야당이 이번 예산안 처리를 놓고 ‘날치기’라고 몰아붙이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4대강사업으로 인한 충돌 외에는 민주당에서 원하는 사업들, 의원 개개인이 원하는 사업들의 예산을 많이 들어줬거든요. 예산문제로 계속 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어쨌든 심사 처리가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은 것에 대해 여야 모두 비판을 피해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위원장으로서 여야에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심 의원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이내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지난 일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듯 아쉬운 점만 몇 가지 지적했다.

“야당이 예산을 볼모로 잡은 것 자체가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중간에 회의에 복귀할 수 있었는데 강경파의 의견대로 죽 떼밀려 나가버리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상임위원회별로 충분한 협의가 이뤄진 후 예결위로 안을 넘겼으면 하는데, 그 점은 여야를 막론하고 아쉬운 부분입니다.”

- 예산안을 처리하면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여야가 ‘혈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당론 때문입니까?

“당론이라기보다 이익의 충돌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차피 ‘제로섬게임’ 같은 것인데, 타협점을 찾는 것이 결국 자신과 지역구의 이익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보니 격렬히 붙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 그런 현 상황을 이해하는 편입니까?

“잘못된 것은 당연히 고쳐야죠. 하지만 이익을 챙기는 것이 곧바로 다음 선거와 연결되기 때문에 그렇다고 봐요. 그래서 처음부터 쓸데없는 예산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상임위가 조정해야 한다는 거예요.”

- 사전 여과장치가 충분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있기는 하지만 상임위에서 처리할 때 전체 예산안의 모습을 염두에 둘 수 없잖아요? 그렇다 보니 엉뚱한 것이 확 부풀려지는 경우가 나오는 거예요.”

이와 관련해 심 의원의 주장은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려면 예결위 자체를 상임위 형태로 바꿔 연중 심사하자는 것이다. 그럴 경우 충분한 논의를 거쳐 필요한 예산인지, 불필요한 예산인지 얼마든지 가려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심 의원은 그런 잘못된 행태들을 하나하나 메모하고 뜯어고치기 위해 법 개정안을 마련 중이다.

심 의원이 예결위원장을 맡을 때 “잘못된 것은 반드시 고치겠다”던 결심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심 의원은 내심 위원장 임기가 1년으로 정해져 있지만, 1년 더 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피곤하고 힘든 자리 아니냐”는 물음에 “2년을 하게 되면 국회의 관행뿐 아니라 예결위가 요구한 자료 제출 스케줄조차 이행하지 않는 정부의 잘못된 행태도 고칠 수 있을 것 같다”며 “연임 여부에 대해 아무런 조항이 없는데, 주변에서 하라면 더 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남보원’이 감사패 줘야 하는 정치인?

심 의원의 의욕은 알아줄 정도다. 단, 그 의욕에는 전제조건이 깔린다. 다름 아닌 진심이 배어 있어야 한다는 것. 이는 심 의원의 생존 비법이자 주변에서 호평하는 경쟁력이다.

“진심으로 대하면 상대방도 그것을 알아줘요. 특히 저는 남들보다 (이동)속도가 느리잖아요? 그러니 유권자들을 만날 때도 많이 만나기보다 적은 수일지언정 마음을 담아 눈을 보면서 악수하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노력해요.”

말 그대로 진심은 통하는 것일까? 심 의원은 2000년 16대 국회에 처음 등원했는데, 당시 표심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진정성을 담은 홍보원고가 유권자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지역구인 안양에서 내리 3선한 심 의원. 벌써 10년째인 국회의원 생활에 만족하고 있을까? 그는 “잘못된 것을 고칠 수 있는 힘이 있어 괜찮은 직업인 것 같다”고 말했다. 심 의원은 그러면서 보람을 느꼈던 한 가지 사례를 소개했다.

“법을 개정한 것 중 가장 보람된 것이 ‘공중화장실법’을 만든 거예요. 쉽게 말하면 여자 화장실 변기를 남자 화장실보다 늘리라는 것인데, 현재에도 모든 공공건물의 화장실 설치규정으로 적용되고 있어요.”

이 법을 고친 동기가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 밖까지 여자들이 줄지어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라는데, 요즘 ‘대박’ 인기를 누리는 KBS 개그콘서트의 ‘남보원(남성인권보장위원회)’이 심 의원에게 감사패라도 줘야 하지 않을까? 결과적으로 남자들이 화장실에 간 여자친구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단축시켜준 것이니 말이다.

이렇게 국회의원 생활을 하면서 보람찬 경우도 있지만, 뭔가 잃어버린 느낌을 주는 부분도 있단다. 현저히 줄어든 말수다.

“정치를 하면서부터 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어떤 회의에 참석해 제 의견을 말하면 그 말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더라고요. 제가 말을 아껴야 회의가 회의답게 진행되는 것을 보니 스스로 말을 적게 하거나 맨 마지막에 하게 돼요. 그것이 일상처럼 되다 보니 친구들을 만나도 말을 잘 안 하게 되더라고요.”

사실 심 의원의 본래 성격은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하는 편이다. 어릴 때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오동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따먹던 장난꾸러기였고, 고등학생 때는 학생회장선거 찬조연설에 나서 주목받기 위해 느닷없이 노래도 불렀을 정도로 쾌활했다.

심 의원은 직접 학생회장을 할 수도 있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꿈도 꾸지 않았단다. 그가 잠시 떠올린 가난했던 옛날 이야기다.

“대부분 어렵던 시절이에요. 머리에 ‘기계독’이 생기기도 하고…. 그때 부모님과 7남매가 7~8평 정도의 ‘상하방’에서 살았어요. 초등학생 때 반장은 종종 선생님 도시락을 싸가거나 학급 환경미화 때 소소한 돈을 내야 했기 때문에 반장이 아닌 회장을 주로 했고요. 제가 미술과목을 싫어했어요. 물감·크레용·도화지 등을 준비해가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안 되니까….”

관련사진

photo

2008년 5월8일 심재철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국회 당대표실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중앙일보> 보도를 인용해 발언하고 있다.

불의의 교통사고가 인생의 최대 고비

7남매 중 막내인 심 의원은 고교시절 선배의 권유로 광주제일고에서 20년 전통을 자랑하는 독서토론 동아리 ‘피닉스’에 들어가 열심히 활동한 학구파였고, 서울대에 들어갈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수재였다. 그러나 제아무리 수재인들 졸음 앞에 장사일 수 있을까? 심 의원의 고백에 따르면, 공부하다 졸릴 때면 이따금 학교 앞 라면가게에서 팔던 ‘새마을’ 개비담배를 사 피우면서 졸음을 쫓았단다.

그렇게 공부해 서울대 영어교육학과에 들어간 심 의원은 한마디로 ‘세게’ 활동한 운동권 학생이었다. 농촌법학회 대표로 뽑혀 서울대 운동판을 움직였고, ‘서울의 봄’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서 학생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물론 학생운동에만 빠져 있던 것은 아니다. 5~6번 미팅도 했는데, 그 중 첫 번째 미팅에서 만난 이화여대 학생과 오래 사귀지 못한 사연이 웃음을 자아낸다.

“같은 과 친구 소개로 만났는데, 주선해준 친구가 ‘잘 데려다 줬느냐? ‘즐거웠느냐’ 등 이것저것 묻더니 갑자기 저한테 ‘이화여대 축제에 가서 풀타임서비스를 해줘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미쳤냐’면서 그 자리에서 거절했지요.”(웃음)

심 의원은 당시의 낭만 대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5년간 옥고를 치른 기억을 더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심 의원은 참 운이 좋은 경우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특별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호적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는데도 교사로 임용됐으니 말이다.

1985년 심 의원은 동대문여중 영어교사로 발령받았다. 당시 서울대를 나온 데다 총각 선생님이니 가끔 책상에 꽃이 놓여 있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단다. 하지만 교사생활도 잠시, 심 의원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방송기자의 길을 걸었다. 그해 12월 MBC에 입사한 심 의원은 외신부·체육부·사회부·국제부 기자로 활동했다.

심 의원은 입사 3년차에 노조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다 1992년 방송민주화투쟁으로 또다시 수감됐다. 그러던 중 1993년 6월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인생 최대 전환점을 맞았다. 한동안 의식불명으로 침상에 누워 있어야 했다.

“제가 칩거생활을 하다 보니 ‘이렇게 무의미하게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결심했어요. 한강변 아파트에 살 때인데, 그때 집에서 원효대교가 보였거든요. 그곳을 보는 순간 자살충동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결국 3급 장애 판정을 받은 심 의원이 정신적 충격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에 하려던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면서부터다.

“다치기 전에 국회의원들의 공약집을 묶어 출판할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그때 목발을 짚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찾아가 각종 선거홍보물을 전부 복사하고 공약부분을 정리했지요. 그때 그 엄청난 양의 내용을 일일이 타이핑해 천리안·하이텔에 공개했어요. 그렇게 작업하면서 잡념을 떨쳐냈지요.”

심 의원은 사고 전 등산·여행·스포츠 마니아였다. 여기저기 다니고 싶고 체험하고 싶은 욕구를 무슨 수로 이겨냈을까? 몸이 허락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기자생활을 접으려던 무렵 뜻밖에 정계입문 제안을 받으면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했다.

바른말 하는 곧은 정치인

“불러줄 때 가자고 생각했어요. 제 몸이 불편한 것을 알면서도 저를 필요하다고 생각해 불렀다면, 거절할 경우 언제 다시 부를지 모르니 그냥 부를 때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호남 출신인 데다 노조활동을 주도한 개혁 성향의 인사가 왜 보수정당을 택한 것일까?

“솔직히 말하면 ‘3김’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어요. ‘3김 정권’은 YS를 끝으로 DJ와 JP는 잡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정치판이 급변할 것이라고 예상했죠. 그래서 당시 ‘민정당으로 가면 욕을 좀 먹겠지만, 그래도 힘을 가진 정당에 들어가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고, 민정당마저 내가 하는 양태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본 거예요.”

그러나 심 의원의 예상은 빗나갔다. 입당해보니 당시 3김의 힘은 여전하다는 사실과, 자신의 생각이 어리석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단다. 그토록 잘못 계산한 탓일까? 심 의원은 1996년 첫 번째 도전한 선거에서 ‘보란 듯이’ 떨어졌다. 그에게 패배의 쓴 잔을 안긴 이는 <하숙생>이라는 곡으로 잘 알려진 가수 최희준 씨였다.

그때의 낙선은 심 의원에게 더할 나위 없는 보약이 됐고, 걸출한 3선 의원을 만든 거름이 됐다. 여기서 잠깐, 또 한 가지 해소해야 할 궁금증이 있다. 광주에 연고를 둔 심 의원이 왜 안양을 지역구로 정했을까?

“중앙당에서 추천한 곳이 2~3곳 정도 됐어요. 그런데 제 몸이 불편하다 보니 안양 평촌이 (돌아 다니기에) 가장 편할 것 같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당선 여부보다 몸이 편한 곳을 찾은 것이니…. 참 설명하기 힘든 결정이었네요.”(웃음)

교사에서 기자로, 기자에서 다시 정치인으로 진로를 바꾼 심 의원에게 “어떤 직업이 가장 좋더냐”고 묻자, 그는 곧바로 “정치인”이라고 답했다. 매사에 의욕이 넘치는 심 의원의 정치적 목표는 무엇일까? 그의 미니홈피를 보면 ‘심재철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어쩌면 심 의원도 내심 대통령을 꿈꾸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에 대한 그의 솔직한 속내.

“장관이나 총리를 해보고 싶은 것이 제 욕망이에요. 그리고 대통령에 대한 꿈도 꿀 수는 있는 것이니까…. 하기는 전두환·노태우·노무현 전 대통령도 하는 것을 보니 못할 것도 아니라는 느낌은 드네요.(웃음) 내년에 당권에 도전할 생각이에요.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이기를, 정작 포부는 자리가 아니라 그저 “국민에게 바른말 하는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심 의원이 소신을 갖고 의정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던 힘, 특히 사고 후 마음을 다잡고 재기할 수 있었던 힘은 서른두 살 때 중매로 만난 그의 아내이자 현 문예당 대표로 활동 중인 권은정 여사와 애지중지 키워온 외동딸 정민 양 덕분이란다.

그간 양껏 잘해주지 못한 미안함을 전하기 위해 가족 앞에서 멋진 색소폰 연주를 들려주고 싶다는 심 의원. 그가 가족을 가장 사랑한다는 진심이야 이미 아내와 딸이 잘 알고 있지 않을까?

글 오흥택 월간중앙 기자 [htoh@joongang.co.kr] 사진 이찬원 월간중앙 사진팀 부장 [leon@joongang.co.kr]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