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연인] '화양연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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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 누구에게나 그런 때는 있을 것이지만 정작 그 아름다운 때가 진행되고 있을 때는 지금이 그런 순간이라고 알지 못할 것이다.어쩌면 가장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은 고통 없인 완성되지 않으므로. 시간이 흘러 고통이 옅어진 다음 모든 생생함이 희미해져 추억으로 돌려진 다음에야 아, 그때! 그때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였다고 말하게 되는 그런 특성의 것 아닌지. '

'아비정전' 에서 장만위(張曼玉)을 알게되어 '완령옥' 에서 반한 뒤로는 어디서든 장만위하면 눈이 뜨이고 귀가 쫑긋거려졌다.

그녀의 얼굴에선 익명의 여자들이 지님직한 고독의 이미지가 물씬거린다.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수수하달수도 없고 웃을 때는 소년스럽기조차하면서 뭔가를 찾느라 그녀의 시선이 허공을 헤맬때면 그 얼굴에 고독이 조금씩 고여서는 계곡을 이룬다.

인생에서 가장 불행한 때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만난 그들.

그녀의 남편과 그의 아내가 그들 몰래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두 사람은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그들이 어떻게 만나게 되었으며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며 그들 사이에 발생했음직한 상황을 리허설해보다가는 종내엔 그들처럼 사랑에 빠져버린다.

두 사람을 배신한 두 사람이 상상한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한 두 사람이 그들처럼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정말 인생은 알 수 없고 신비한 것이다.

장만위(張曼玉)의 느린 움직임 속엔 완숙함이 넘쳐흐른다.원피스 바깥으로 드러낸 외로운 팔이나 원피스 안에 감춰진 아랫배의 움직임을 응시하는 일은 봄날 방안에 찾아든 아지랑이를 얼굴에 받고 낮잠에 들었을 때처럼 아련하다.

화면이 정지하는 순간이면 그 자리에 추억이 되지 못해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 밀려오기도 한다.지킬 수 없었던 맹세들. 변해버린 마음들. 이제는 용서해야지. 그래야 벗어날 수 있지.

왕자웨이(王家衛)는 그녀에게도 그에게도 외롭다, 사랑한다, 고통스럽다고 말하게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선이 분명한, 단정하고 아름다운 원피스를 입혀 국수통을 들고 좁은 계단, 혹은 빗속을 오가게 하거나 복작거리는 사람들 속의 간이의자에 앉혀 신문을 읽게 할 뿐. 그로 하여금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매고 긴 담벽에 서 있게 하거나, 오지 않는 그녀를 기다리게 하거나 텅빈 사무실에서 연재소설을 쓰게 할 뿐. 우리는 아는데 그들 연인은 모른다.

서로가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서로가 간발의 차이로 서로의 흔적을 찾아 같은 장소를 방문한 것도 알지 못한 채 엇갈릴 뿐이다.

누구에게도(심지어 그녀에게도) 말하지 않고 간직한 사랑을 유적지의 구멍에 대고 오래오래 정성스럽게 발설한 후 구멍을 메우는 량차오웨이(梁朝偉)를 보고 있으려니 이루어진 사랑을 간직할 힘이 우리에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사랑은 잊혀지기 시작하는 것이라는 생각. 갖지 못한 사랑, 엇갈린 시간만이 유구하다.

그들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앙코르와트 유적지의 구멍에 봉해진 채 불멸이 된 것처럼.

신경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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