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트라다 위기에 몰아넣은 30년 '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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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불법 도박업자로부터 지난 2년간 모두 10억페소(약 2백50억원)를 받았다는 혐의로 야당 의원들에 의해 탄핵 발의된 조셉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이 점점 더 위기에 몰리고 있다.

시민들과 야당 의원들이 그의 하야를 촉구하는 시위를 강화하고 있는데다 도박 연루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속속 공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뇌물의혹사건을 폭로, 에스트라다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루이스 싱손 일로코스수르주 주지사는 에스트라다의 30년 지기(知己)다.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30년 우정을 깨버리고 원수로 돌아선 배경에는 불법도박 영업을 둘러싼 암투가 깔려 있다.

싱손은 '후에텡의 왕' 으로 불리는 필리핀 도박사업의 대부다. 필리핀 고유 도박인 후에텡은 특정한 숫자를 써넣은 칩을 항아리에서 꺼내 맞히면 배당금을 주는 도박이다.

루손섬에서만 한해에 40억페소(약 1천1백억원)가량의 이익이 남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불법이익이 너무 커 큰 사회문제로 부각됐지만 도박업자들은 막대한 이익금을 활용해 관리.정치인.경찰 등을 관리해와 후에텡은 갈수록 기승을 부려왔다.

그런데 이번에 싱손이 의회 청문회에서 불법상납 고리의 정점에 에스트라다가 있다는 결정적 증언을 함으로써 필리핀 정국이 사상 최대의 뇌물 스캔들에 휘말린 것이다.

현지 언론은 이번 사태를 싱손과 에스트라다간 영업권 관련 분쟁으로 보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지난 9월 후에텡과 비슷한 방식의 도박을 허가하고 정부가 설립한 PAGC사에 독점영업권을 주었으며 싱손의 정적을 PAGC사 고문으로 임명했다. 또 사법당국을 동원해 불법도박과 관련한 비리혐의 수사로 싱손의 목을 조였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를 통째로 빼앗길 위기에 직면한 싱손은 "도박업자들의 상납고리 정점에 대통령이 있다" 고 에스트라다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에스트라다의 애칭 '에랍' 이 적혀 있는 도박업자들의 상납 장부를 공개한 그는 자신이 "지난 2년 동안 정기적으로 도박업자와 에스트라다 사이를 잇는 돈 심부름꾼이었다. 대통령측이 나를 암살하려 한다" 고 주장했다.

에스트라다는 즉각 "자신의 위법사실을 은폐하려는 싱손의 음모" 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하지만 폭로자 자신이 도박업계의 대부였던 만큼 국민의 절대다수는 에스트라다의 항변을 한갖 '연기' 에 불과한 것으로 믿고 있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7%가 "대통령이 도박업자로부터 상납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고 대답했다.

종교계와 시민운동단체도 에스트라다에 반대하는 단체를 결성, 하야를 촉구하고 나섰다.

18일엔 야당의원 41명이 의회에 대통령 탄핵안을 제출했으며 마닐라와 금융 중심도시 마카티 등 필리핀 곳곳에선 수만 군중이 에스트라다의 퇴진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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