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국악 읽기] 즉흥연주, 국악과 만나니 절묘한 조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모두 것을 포기하라. 우리는 잘못된 궤도에 들어섰다'

'너는 음악가이므로 네 스스로 시작하라'

'네 손과 발의 리듬이 동요하는 대로 연주하라. '

이것은 주문(注文)이 아니라, 슈톡하우젠이 1968년 작곡한 악보의 일부다.

그는 20세기 후반 일상적인 악보의 표기 없이 자신이 표기한 전혀 새로운 기보 체계에 따라 연주자들이 그들간의 직관에 의해 연주해 가는 독특한 음악, 즉 직관음악을 추구했다.

많은 현대음악 작곡가들은 기존의 작곡방식에서 벗어나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형태를 지향한다.

우연성을 강조하는 직관음악, 즉흥음악은 종결구를 미리 정하지 않고 악보의 어느 지점에 우연히 시선이 중복되면 연주를 마치기도 하고, 오선을 그린 커다란 어항 앞에 앉은 연주자가 물고기의 움직임을 그래픽으로 표현할 뿐 연주자에게 구체적인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

이렇게 다양하게 시도되는 현대음악에서 사운드 없는 묵음(默音)연주도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요컨대 악기편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거나 오선지 악보를 사용하지 않아도 작곡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추구하는 현대음악 작곡가의 작곡 의도는 연주자에게 자율성을 부여함으로써 즉흥적인 감흥으로 연주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서구 예술음악은 연주자의 자율성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작곡가가 악보에 제시한 요구들을 준수하지 않으면 연주 상의 실수로 치부되니 기껏해야 다이나믹이나 프레이징 정도에 대한 자율성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반면 판소리 산조 시나위 등은 연주자가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음악이다.

다만 누구에게나 자율성을 허용할 수는 없다. 연주자의 기량이 확보돼야하고, 그 자율성이 예술적 완성도로 연결돼야 한다. 정해진 장단의 틀에서 즉흥성을 발휘해야 하는 원칙만은 지켜야한다.

지난 14일 전주 우진문화공간과 익산 솜리문화예술화관에서 열린 '재미있는 현대음악-직관의 음악' 공연에서는 슈톡하우젠의 '일곱날로부터' , 레오 브라우어의 '칸티쿰' , 김선경의 '사각형을 위한 극' , 윤상열의 '가을의 순결' , 이윤경의 '진동' , 김승근의 '樂 Ⅱ' 등이 연주됐다.

하나같이 리허설이 불필요한 음악이다.

시나위의 연주방식과 일맥상통하는 이들 음악에서 불규칙한 박자, 평균율이 아닌 미묘한 음정 사용 등의 국악적 요소와 현대음악의 속성이 멋진 조화를 이루어냈다.

가야금.대금.생황.기타.비올라 등의 악기가 어우러졌음에도 이질적인 음색의 마찰은 적었다.

다만 기타나 비올라 연주자가 그들에게 익숙한 서양의 조성음악을 연주하게 되면 국악기 연주자가 연주상의 불편함을 감수해야하는 문제가 있었다.

모처럼 현대음악의 지방순회 나들이에 지역 주민들의 참여와 관심이 저조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임미선 전북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