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길 산책] 가을빛 짙게 물든 철원들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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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세월이 수유(須臾)라던가. 올림픽에 취해 겨드랑이에 찬바람이 드는 줄도 모르고 벙벙거리다보니 어느새 가을이다. 늦여름 그 장하던 고추잠자리떼가 온데간데 없고 햇살도 금기(金氣)에 눌려 야트막하니 투명하다.

옛 어른들은 섬돌에 떨어지는 오동잎 하나를 보고도 소식을 알았다던데.... 시계추 같은 생활이 '웬수' 라고 스스로 핑계대보지만 미욱함에 화마저 치민다.

하지만 봄처녀는 부젓가락을 녹이고, 가을총각은 바람벽을 치고나간다더니 괜스레 스산해지는 게 아직은 가슴이 굳지않은 모양이다.

내친 김에 가을을 보리라 작심코 이곳 철원땅 민통선안(동송읍 양지리)에 와보니 어림했던 것보다 시간이 한두 걸음 앞서 달려가고 있다.

중간에 아이스크림고지를 두고 북으로 낙타고지, 서쪽 백마고지에 둘러싸인 너른 벌판은 추수가 거지반 끝나 논바닥마다 그득했을 풍요의 흔적만을 남긴 채 오후 햇살에 황량히 누워 있다.

마을 앞을 지나는 금강산철길 자리가 잡초를 뒤집어쓰고 복구되길 고대하고 있는 옆으로 좁다랗게 심어진 수수가 무엇을 사색하는지 박새가 쪼아대는 것도 아랑곳않고 한껏 이삭모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지난 여름 그다지도 싱그럽게 번들대던 때깔을 접어두고, 비바람에 버거웠던 삶을 반추하는 것이리라. 노숙한 기품이 아름답다.

들국화가 떨기떨기 피어 있는 논두렁에도 붉게 물든 바랭이며, 여뀌며, 강아지풀들이 잘디 잔 씨들을 영글리며 한해살이를 마감할 준비를 하느라 이따금씩 산들거리는 바람결에도 차분하다.

아하, 우리네 인생도 이럴 수만 있다면 무슨 욕심이고 악다구니가 필요하리요. 부끄러운 생각에 발길을 돌리려니 어디 한군데 멋대로 내디딜 수가 없다. 가급적 맨땅을 골라 밟으며 두어 마장 가다보니 철새들의 쉼터로 유명한 토교저수지가 반긴다.

관리사무소 신축공사가 한창인 곳을 에둘러 비탈진 뚝방에 올라서는데 예고없는 이방인의 출현에 놀란 듯 수백마리의 기러기떼가 물을 박차고 "궉궉" 대며 날아오른다. 구만리 장천을 나는 줄만 알았던 기러기의 비상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긴 처음이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기러기는 좀더 하늘이 쨍할 때 오는 거 아닌가" "원래 그게 정답인데, 아 글쎄 저놈들은 이곳이 좋은지 아예 붙박이가 돼버렸지 뭡니까. "

인간들은 남북으로 갈려 쌈질을 하느라 함부로 드나들지도 못하도록 만들어놓은 이곳이 저들에겐 생리마저 바꾸고 살 정도로 천국이라니.... 씁쓸한 상념도 잠깐, 굽이굽이 산허리를 감돌아 북한쪽까지 이어지는 물길을 따라 눈을 돌려보니 장관이 유장한 게 마치 다도해에 와있는 착각마저 든다.

붉게 물들어가는 산그림자를 거꾸로 안은 사이사이로 코발트색 하늘조각이 어른거리고, 헤아릴 수 없는 새떼가 무리무리로 오르락내리락 수면에 파문을 남긴다.

흥에 겨워 1㎞쯤 됨직한 뚝방을 왔다갔다 하는데 저만치 짙은 하늘색 꽃 한송이가 눈에 띈다. 바람 차고 메마른 곳에 자란 탓에 난장이가 된 패랭이꽃이다.

쪼그리고 앉아 질긴 생명의 환희를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옆에선 개미들이 줄지어 무언가를 물어나르느라 분주하고, 방아깨비.송제뚜기.오줌싸게에다 철늦게 태어난 여치까지 가을색으로 치장한채 얼마 남지않았을 그루 삶을 열심히 보내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께름칙했던 이곳 민통선에서 진정 흥건한 가을을 보고, 가을을 배웠다.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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