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여론조사] 물위로 떠오른 동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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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 9일 오후 8시,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위치한 게이 쇼클럽 '하하호호' . 여장 남자 동성애자 5명이 코믹한 춤으로 박미경의 '집착' 을 부르자 손님 60여명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이어 게이 30여명이 번갈아 나와 일본.태국 등 세계 각국의 전통무용을 선보였고 쉬는 시간에는 '손님과의 대화' 도 마련됐다. 손님 대부분은 회식하는 회사원들이었으며 부부와 가족 단위도 있었다.

개그맨 김형곤씨가 운영한다기에 '코미디 클럽' 인 줄 알고 부인과 함께 왔다가 깜짝 놀랐다는 장현수(31)씨는 "공연을 보다 보면 게이들 속에 내재한 여성적 감성이 강하게 드러나 동성을 좋아할 수도 있겠구나란 생각이 든다" 고 말했다.

또 부모님 은혼식 기념으로 가족과 이곳을 찾았다는 대학생 김모(21)양은 "동성애자들도 공개적으로 자기 직업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고 말했다.

지난달 9일엔 연세대에서 동성애자들의 공개적인 문화축제 행사인 '무지개2000' 이 처음으로 열렸다.

20여개 동성애자 단체가 참여, '청소년 동성애자의 인권' 을 주제로 한 좌담회를 비롯해 각종 공연과 토크쇼 등을 열었다.

참여자 5백여명 중 1백여명은 연세대 교문까지 동성애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을 들고 촛불행진을 벌였다. 동성애 인권운동이 음지에서 열린 공간으로 나섰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지닌 행사였다.

비슷한 시기에 열린 제2회 퀴어 국제영화제도 눈길을 끌었다. 이 영화제엔 1백80여편의 퀴어 영화들이 선보였고 관객 1만여명이 다녀갔다. 동성애자의 영화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문화행사였다.

서양은 오래 전에 동성애에 대한 고민을 거쳤으나 국내의 동성애 문화는 역사가 짧다. 깊숙한 그늘에 숨어 지내던 이들이 이름을 내민 첫 모임은 1993년에 만들어진 '초동회' 다.

이후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움직임이 일면서 컴 투게더(연세대).사람과 사람(고려대).마음006(서울대)등이 등장했다. 하지만 그들의 본격적인 활동은 인터넷이 개화한 98년을 넘어서면서였다. 모임의 수가 급속히 늘어났으며 동성애 모임이 없는 대학이 없을 정도가 됐다. 국내 동성애자 수는 한 연구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1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영화.방송.연극 등 일반 문화영역에서 이제 동성애는 더 이상 별난 소재가 아니다. 90년대 초.중반 조너선 뎀의 '필라델피아' , 왕자웨이의 '해피 투게더' , 한국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 등이 동성애를 주제로 다뤘으나 최근 상영된 '아메리칸 뷰티' '피델리티' '해피 텍사스' 등에선 동성애가 생활 속의 한 단면으로 그려진다.

함인희 이화여대(사회학)교수는 "이성애가 정상이고 동성애는 비정상이란 시각으로 소수에게 억압을 가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는 우리 사회의 권력 관계가 드러나는 방식과 비슷하다" 고 분석한다.

함교수는 이어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의 동성애 담론은 지나치게 앞서가는 반면 일반인들은 동성애를 받아들일 준비가 너무 안 돼 있는 것이 우리 현실" 이라고 말했다.

신용호.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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