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 칼럼] "초현이를 내버려 두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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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프로골퍼 박지은 선수가 프로에 갓 데뷔했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 박수남씨는 딸의 성적이 기대에 못미치자 "지은아, 헝그리정신을 갖도록 해라" 고 충고했다.

그러자 박지은은 "가난했던 적이 없는데 어떻게 헝그리정신을 가져요" 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고 한다.

서울의 유명한 음식점 딸로 고생을 모르며 자란 박지은이 '배고픔을 참아가며 목표를 이루는'헝그리정신을 알 리가 없다.

시드니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하나같이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왔다는 소식을 접하며 가슴이 저몄었다.

예나 지금이나 운동선수들은 왜 모두들 집안이 어려운지 답답했지만 한편으론 그동안 자취를 감췄던 '헝그리정신' 을 다시 보는 것 같아 반갑기도 했다.

사실 경쟁이 극심한 스포츠에서 정신력은 승리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고 정신력 중에서는 헝그리정신이 으뜸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들의 승리가 자녀들의 정신교육에 좋은 본보기가 됐다고도 한다. 풍족하게만 자라온 요즘 세대들에게 어려운 환경을 딛고 목표를 이룬 금메달리스트들의 헝그리정신은 충분히 교육적이었을 것이다.

국가의 명예를 드높인데다 국민의 정신교육에도 일조를 한 메달리스트들이 귀국 후 최고의 보상과 찬사를 받고 있는 것을 보니 흐뭇하다.

그런데 일부에서 지나치게 이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 하는 것 같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사격에서 은메달을 딴 강초현 선수(대전 유성여고 3년)다.

강선수는 첫 메달리스트인데다 아버지를 여읜 어려운 가정의 소녀라는 점, 초롱초롱한 미모 등으로 하루아침에 '올림픽드라마' 의 주인공이 돼 버렸다.

그러자 광고업계와 방송, 심지어 대학들까지 강초현 모시기에 나섰다. 강초현은 최근 KBS-2 TV 쇼프로에 출연했는가 하면 16일부터 방송하는 '청춘'시트콤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또 백화점의 모델로도 활동하고 내년 선보일 조성모의 앨범에도 출연, 가수(?)로도 선보일 계획이다. 한체대.고려대.충남대 등 대학들도 강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17세의 어린 소녀가 이같은 갑작스런 변화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걱정인데 최근 그녀를 아끼는 한 네티즌의 충고가 가슴을 친다.

"집중된 정신력으로 승부를 가르는 게 사격이다. 강초현은 물론 세계 정상급 선수다. 그러나 총 대신 마이크를 잡는 지금의 현실이 오래 간다면 분명 정신력에서 다른 정상급 선수들에 밀릴 수밖에 없다. 일부 못된 어른들 제발 초현이를 내버려 두세요. "

권오중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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