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방향 잃은 IMT-200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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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안병엽(安炳燁) 정보통신부 장관은 25일 차세대 이동통신(IMT-2000)의 핵심쟁점인 기술표준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사업신청서 접수를 한달간 연기한 끝에 나온 그의 발언은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0과1의 디지털을 다루는 정통부 장관의 발표치고는 모호한 표현으로 가득했다.

"복수표준은 정부가 단일화를 유도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모두 비동기를 선택하거나 동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IMT-2000 서비스 실시시기를 못박은 적은 없다" 는 대목이 핵심이다.

쉽게 해석하자면 이렇다. '업계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라. 서비스 시기를 연기하는 게 필요하다면 연기하겠다' . 좀더 원색적으로 말하면 '비동기식을 고집하는 SK텔레콤.한국통신과 동기식을 희망하는 장비업체인 삼성.현대전자가 물밑에서 타협해라. 서비스 실시시기를 1~2년 연기하면 장비업체들도 그동안 비동기방식을 개발할 수 있지 않느냐' 는 주문이다.

정통부는 당초 기술표준에 대해 '복수표준으로 하되 업계 자율에 맡긴다' 는 두 가지 원칙을 내세웠다. 그러나 安장관 발언으로 복수표준은 사실상 물건너갔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최근 중국 차이나유니콤의 핵심 경영진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들은 한국의 동기식 기술에 큰 관심을 표시했다.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지만 중국이 IMT-2000에서 일부 동기식 기술표준을 채택할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또 일본은 1개 업체가 이미 동기식을 채택했다.

정작 동기식의 종주국이라 자랑하던 한국만 동기식이 실종되는 이상한 구도가 돼버린 것이다.

중요한 쟁점 하나도 슬그머니 증발됐다. 한국 정보통신의 미래를 위해 일본처럼 동기.비동기를 함께 운영할지, 아니면 비동기 하나로 승부를 걸어도 괜찮은지를 한번도 짚어보지 못한 것이다.

정통부 움직임을 손금보듯 들여다보는 통신업계 핵심 관계자들은 "요즘 安장관과 정통부 실무자들 사이에 온도차가 느껴진다" 고 말한다.

"장관이야 말썽 안나는 게 최고죠. 언제 청문회가 열릴지도 모르니까요(A사)" "국.과장들은 정통부의 위상에 더 신경을 쓰는 눈치예요. 핵심정책인 IMT-2000조차 정부의 조정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정통부는 산업자원부에 흡수돼도 할 말이 없죠. 곧 우정사업본부도 떨어져나가는데...(B사)" .

우왕좌왕하는 정통부. 한국 정보통신의 백년대계가 헤매는 가운데 통신업체들은 이미 정부의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느낌이다.

이철호 정보과학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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