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현대서 '이대원 2000' 전시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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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노랑과 녹색의 짧은 선들이 화면 전체를 채우고 있다. 빨강과 보라로 채색된 나뭇가지에는 하양과 연두의 배꽃이 소담스럽게 피어있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어제 개막된 '이대원 2000' 전 에 걸린 '배꽃' 을 보면 문득 그림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싶어 진다.

나무를 돌아 무덤처럼 따뜻해 뵈는 뒤편 동산으로, 꿈결같은 풀밭속 오솔길로.

원로화가 이대원(79)이 지난 5년동안 치열한 예술혼으로 그려낸 40여점을 건 이번 전시회는 오는 10월10일까지 열린다. 그 중에는 1천호 크기의 대작도 3점 포함돼 있다.

그의 작품들은 원근과 명암을 무시하고 선과 색으로만 풍경을 그려내는 게 특징. 이번에도 강렬하고 환상적인 색채로 그려낸 '윤곽과 인상으로서의 풍경' 을 보여준다.

5m짜리 대작 '인왕산' 에는 눈오듯 떨어져내리는 흰색 점 사이로 여러 색깔의 짧은 선들이 빗방울처럼 뿌려져있다.

멀리 아버지의 그늘같은 산을 배경으로 나무가 두 그루 서있다. 가지가 물결에 일렁이는 히드라의 머리칼 처럼 휘어지고 뻗어나간다. 나머지 공간에는 원색의 점들이 군무를 벌일 뿐 구체적인 형상이 없다.

한국화의 여백과도 같은 공간은 노랑의 설렘으로 초록의 희망으로 보라의 환상, 남청의 서늘함으로 가득차 있다. 이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풍경을 떠올린다.

할미꽃을 캐고, 넓은 산소터에서 숨바꼭질 하던 앞동산, 겨울이면 썰매를 타던 논과 연을 날리던 바람부는 언덕이 있다. 누이가 대처로 떠나버린 허전함을 달래며 버들피리 불던 냇가도 있을지 모른다.

원색이 빚어내는 생명력과 동경의 분위기는 '못' 같은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수련이 떠있는 연못위로 빨강과 보라의 나뭇가지가 화면을 가로지르고 있다.

초록의 연꽃과 잎들 위로 흩날리는 노란색 점들은 무엇일까. 넘치던 생기와 생명력, 그리고 뭔가가 채워지지 않는 청춘의 아쉬운 한숨일까. 그것은 색깔의 비를 맞으며 안개속 처럼 숨어있다.

그래서 이대원의 풍경은 그냥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그 속으로 걸어들어가고 싶은 풍경이다. '풍경이 처음으로 마음에 와닿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작가가 주로 그리는 것은 자신의 제2 작업실이 있는 경기도 파주의 과수원 주변 풍경이다. 그는 "나무는 삶의 방향으로 가지를 뻗으니 나뭇가지는 곧 생명의 선이다.

봄 가을로 다르고 아침 저녁으로 다르다" 며 "수령 50년의 고목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고 설명했다. 02-734-6111.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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