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이 지성 압도한 무라카미 하루키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취재하러 갔다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났다. 메인 프레스센터(MPC)의 복도를 걷다가 마주쳤다. 그는 올림픽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일본 매체의 청탁을 받고 시드니에 갔다. 하루키를 중앙일보 취재 부스로 불러 사진을 찍고 인터뷰했다. 첫 질문은 ‘개막식을 본 소감’이었다. 하루키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너무 국가를 앞세운다. 애국자들 천지다. 너무 지루해서 보다 말고 나가 맥주를 마셨다.”

며칠 뒤 야구장에서 하루키를 다시 만났다. 한국과 일본이 동메달을 놓고 맞붙은 경기였다. 그는 조용히 경기를 관전했다. 뒤지던 한국이 8회에 경기를 뒤집었다. 그러자 하루키는 손바닥으로 취재석 책상을 내리쳤다. 그러곤 벌떡 일어나 경기장을 떠났다. 대회가 끝난 뒤 돌아와 은사님을 뵈었을 때 이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문학평론가인 은사님께서는 크게 웃으셨다.

“하루키는 제 소설의 주인공들을 좀처럼 다다미에다 재우지 않는다. 스스로 국제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같다. 어쩌겠는가. 그날 하루키는 본능대로 행동했던 모양이다.”

올림픽·월드컵 같은 국제대회는 애국심을 자극한다. 스포츠에 내셔널리즘이 만연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비판이 현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애국심은 본능이다. 그날 야구장에서 하루키의 본능도 지성을 압도했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때 붉은악마가 보여준 그 거대한 에너지를 누가 제어할 수 있는가. 국제경기를 앞두고 애국가가 울려퍼질 때 우리는 곧잘 가슴이 뭉클해진다.

프로야구·프로농구 등 국내 스포츠에서도 경기를 하기 전에 애국가가 연주된다. 이를 두고 몇 차례 논쟁이 있었다. 2005년 4월 4일 ‘한겨레’는 ‘관료문화의 잔재’라고 비판했다. 2006년 9월 19일 ‘일간스포츠’는 “대한민국이 존재하지 않으면 K-리그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기자는 논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계속 애국가를 듣고 싶다.

유럽의 주요 리그는 경기 전에 국가 연주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프로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국가를 연주한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며 고조된 애국심이 프로 경기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 프로야구에서 처음 국가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아이스하키에서는 1946년부터 경기 전 국가 연주가 관례로 정착했다.

국내 프로 경기를 중계할 때, 방송국에서는 멘트 없이 애국가만 내보내기가 거북한가보다. 리포터가 양팀 감독을 인터뷰하거나 기록을 비교한다. 그러나 애국가는 배경 음악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여성 리포터의 들뜬 목소리는 정지된 경기장 화면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애국가는 보통 1절만 연주되고, 1분이면 끝난다.

시인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는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애국가를 틀던 시절의 야유다. 나중에 대학 총장이 된 머리 좋은 시인의 시다. 1989년 11월 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KBS교향악단과 함께 베를리오즈를 연주한 지휘자 정명훈은 앙코르곡으로 애국가를 연주했다. 그는 “전에는 하라고 해서 했지만 지금은 제가 하고 싶어서 합니다”라고 말했다.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허진석 기자

중앙SUNDAY 구독신청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