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일상이 된 후엔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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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여덟 살인 딸아이가 하루는 꿈 얘기를 했다. 커서 화가가 되겠다며 엄마는 나중에 뭐가 되고 싶으냐고 묻는다. 처음에는 직장 다니는 두 아이의 엄마인 내게 새삼스럽게 웬 꿈 타령인가 했다. 그런데 꿈꾸는 자가 아름답다고 했던가, 요즘 내 삶이 팍팍했던 건 꿈꾸는 걸 잠시 잊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법대를 졸업하고 몇 년 동안 번번이 사법시험에 낙방하던 시절 참 막막했다. 일찌감치 사시에 합격한 친구,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해외 유학을 가는 친구…. 모두들 제 몫을 하고 있는데 나만 뒤에 남겨져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이러다가 사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차갑고 어두운 터널에 갇힌 것 같던 그 시절을 버티게 해준 것은 나도 일을 하고 싶다는, 사회에서 무언가 역할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꿈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로펌의 기업자문 변호사가 돼 그토록 원하던 일을 하고 있다. 기업 업무와 관련한 다양한 법률은 물론 회사 설립부터 기업 인수합병(M&A), 회사 해산 및 청산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쳐 필요한 법적 절차와 요건을 조언하고 계약서와 문서를 작성한다. 기업들의 프로젝트 추진은 늘 긴박하게 돌아가 우리에겐 기업이 원하는 시간에 맞춰 답변을 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우리의 의견에 따라 기업이 새로운 사업 추진을 할지 결정할 수 있어 혹시 우리가 놓친 법률적 쟁점이 없는지 늘 신경을 쓴다. 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고 지금 내 현실은 과거에 꿈꾸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 꿈이 직업이자 일상이 돼 버렸다. 꿈이 일상이 된 이후에 대해 우리는 무관심하다. 마치 동화 속 공주님이 왕자님과 행복한 결혼식을 올리고 난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 것처럼.

평범한 일상이 돼 버린 나의 일보다 다른 일이 더 매력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일찌감치 성공해 부와 명성을 손에 쥔 이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스포츠·연예계를 휩쓸고 있는 아이돌 스타들, 능력 있는 행정가, 어떤 분야의 전문가, 학문 또는 예술계의 대가로 명성이 드높은 분들을 보면 왠지 나의 평범한 일상이 구차해 보인다. 박차고 나가서 뭔가 획기적인 일을 벌여야 할 것만 같다. 그런데, 그분들의 일상은? 아마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의 대부분을 기량을 유지하고 향상시키는 데 쓰고 있을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인 50대 중반의 준비되지 않은 은퇴가 최근 사회적 관심사가 되고 있다. 안정된 노후생활을 위해서는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지만 집 장만과 자녀교육을 위한 지출이 많다 보니 노후자금은 턱없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일을 계속 하고 싶은데 은퇴 이후 재취업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스·로마의 철학자들은 일은 안 할수록 좋은 것이라며 게으름을 미덕으로 받아들인 적도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많은 사상가는 ‘우리가 일하는 궁극적 목표는 행복을 체험하기 위해서’라고 설파했다. 마르크스는 오직 생산활동을 통해서만 자아실현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현대의 여러 학자들이 발표한 연구 결과를 보더라도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삶에 더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직업을 통한 목표의식과 도전의식이 인간을 더욱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딸아이와의 대화는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일을 하고 싶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때의 그 먹먹한 고통을 잠시 잊고 있었다. 뭐가 된다는 것은 꿈의 시작일 뿐 꿈의 완성이 아님을 몰랐던 것이다. 내게 주어진 일이 있다는 것은 계속 꿈꾸며 살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다시 꿈을 꾼다, 그리고 딸아이가 조금 더 크면 꿈이 일상으로 된 이후에 대해 같이 얘기해 보리라. 갑자기 내일 하루의 또 다른 시작이 기다려진다.

임정하 법무법인 충정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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