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택시기사 참모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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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프랑스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샤를 드골의 머리를 떠나지 않은 화두(話頭)는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전후 국제질서에서 프랑스의 위상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드골은 사회통합을 이루고 프랑스의 이미지를 국외에 선양함으로써 '프랑스의 영광' 을 구현하는 중요한 수단을 문화에서 찾았다.

문화장관 직책을 신설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오른팔인 앙드레 말로를 앉혔다. 말로는 드골이 물러나던 1969년까지 장장 11년간 문화장관으로 재임하며 프랑스 문화정책의 기틀을 잡았다.

문화재 보호.문화예산 확보.창작 지원.지역문화 활성화 등 프랑스 문화정책의 큰 줄기가 다 그때 마련됐다. 말로가 확립한 문화행정의 대원칙은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는 것이었다.

단순히 소설가의 범주에 넣어 생각할 수 없는 '큰 그릇' 이 말로지만 그는 '인간의 조건' 을 쓴 소설가로 흔히 우리의 머리에 각인돼 있다.

엊그제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취임한 김한길 장관도 베스트셀러 '여자의 남자' 를 쓴 소설가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소설에서 그는 "세상이 이만큼이나마 아름다운 것은 공룡과도 같은 세력 앞에 외롭게 맞선 사랑하는 여자와 남자들이 어디엔가 곳곳에 숨어 있기 때문" 이라는 기억에 남을 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1년도 넘게 공권력의 수배를 받아온 전 신용보증기금 지점장 이운영(李運永)씨가 검찰에 출두하던 날, 그는 한빛은행 대출외압 의혹으로 사임한 박지원(朴智元)장관 후임으로 문화행정의 총수가 됐다.

베스트셀러 작가에서 장관이 된 그의 속내가 어떨지야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는 취임일성으로 '말로의 원칙' 을 되풀이했다.

또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경제난만 아니었으면 문화대통령이 됐을 만큼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은 분" 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듣기에 따라 지금은 여유가 없어 문화대통령을 겸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한다.

한때 청와대 보좌관들 사이에 金장관의 '택시기사 참모론' 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있던 지난해 7월 그는 한 회식 자리에서 "유능한 택시기사는 손님에게 길을 묻지 않는다" 며 "평소 길을 익히고 열심히 지도를 보고 교통정보를 챙겨두는 유능한 택시기사가 손님을 모시는 자세로 대통령을 보필해야 한다" 고 설파했다.

경제문제에 이어 남북문제로 여념이 없을 대통령을 잘 모시는 유능한 택시기사가 돼주길 기대해 본다.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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