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애덤 스미스의 오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내용을 따지기 전에 레토릭이 근사해 밑줄부터 긋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국부론' 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그러하다.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은 푸줏간이나 양조장이나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휴매니티가 아닌 이기심을 생각하고, 결코 우리의 필요가 아닌 그들의 이익을 말해주어야 한다. "

*** 산유국과 의사의 이기심

이런 현상 인식은 애덤 스미스 경제학의 핵심을 이룬다. 시시껄렁한 이타심 설교 따위로는 어림도 없고, 차돌멩이처럼 단단한 이기심으로의 무장이야말로 경제를 움직이는 힘이라는 말씀이다.

예의 그 엉뚱한 선전 '보이지 않는 손' 의 조화도 실은 이런 이기심 투쟁의 산물이렷다. 그러나 첫눈에 홀딱 반했다가 점차 매력이 사라지는 일이 인생에 아주 흔하다. 최근 우리 주변의 몇몇 현상만 둘러봐도 위대한 석학의 소신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있다.

먼저 배럴당 37달러까지 치솟은 원유 수급 불안이 있다.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는 유가 급등의 원인은 무엇보다 소비에 비해 생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수급 균형 방정식은 경제학자들이 만들어낸 소일거리일 뿐이고, 현실에서는 불균형이야말로 정상이다.

문제는 그 불균형이 더 생산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생산할 의사가 없어서 야기됐다는 점이다.

많이 퍼내 싼값을 받기보다 적게 퍼내 비싼 값을 받는 것이 이문이라면, 중동의 독재자든 아라비아의 왕족이든 그 이기 계산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올해만 해도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들은 원유 수출로 2천5백억달러를 벌어들여 판매수입을 2년 사이에 두배로 불렸다.

반면 수입국들은 그만큼 무역적자를 보고, 또 그만큼 물가가 올랐을 터이다. 물론 그 고통의 책임을 몽땅 산유국에만 돌릴 수는 없다.

세계 원유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메이저' 들의 농간도 있고, 소비자 가격의 4분의3을 세금으로 훑어가는 수입국 정부의 욕심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미스의 관찰로는 그런 이기심이야말로 공장을 돌리고 차를 움직이고 방을 덥히는 힘인 것이다.

과연 그런가? 천만의 말씀이다. 근래의 유가 폭등으로 우리 경제는 성장률이 1% 가량 떨어질 것이라는데 이로써 간단히 5조원의 소득이 날아간다.

그 별난 이기심 강의와는 달리 이렇게 공장이 문을 닫고, 자동차가 멈추고, 방이 추워지는 것이 현실이다. 알라신이 그렇게 가르쳤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고 산유국 추장들에게 눈 한번 흘기지 못하고, 석유 메이저들한테 팔매 하나 던지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다.

생명을 담보로 '도박하는' 의료계 일각의 폐업도 예외가 아니다. 환자의 병을 고치는 일이 정녕 의사의 이기심 때문이라면 누가 감히 거기 돌을 던지랴.

그러나 현실은 반대로서 그 이기심 때문에 환자를 버려두고 있지 않은가□ 늙어 죽는 의사는 많아도 굶어 죽은 의사는 없는데 왜들 이 야단이냐는 술자리의 익살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필요 못지 않게 그들의 이익을 존중한다.

몇푼의 수가(酬價)인상이 투쟁 목표가 아니라는 의젓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당장 의사를 찾는 환자는 물론이고 정부와 국민 역시 그들을 굶기지 않을 결심과 준비를 갖추고 있다.

문제는 오히려 점입가경으로 늘어나는 그들의 요구 사항이며, 더구나 그 요구들이 떳떳하게 비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 휴매니티 발휘할 수 없나

예컨대 구속자 석방과 수배해제 같은 '전제조건' 이 충족돼야 협상에 임하겠다는 투쟁 지도부의 태도에 국민은 그저 아연할 뿐이다.

얼마나 정부가 물렁하게 보였으면 저러랴 하고 혀를 차면서도, 환자의 생명을 볼모로 나라의 법 질서마저 뭉개려 드는 그 불손한 이기주의에 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제야 밝히지만 스미스가 이기심만 강조한 것은 아니다. 다른 저서 '도덕감정론' 에서 그는 열렬히 이타심을 설파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경제적 이기심과 윤리적 이타심이 대치할 때, 그 해결사로 법적 정의심을 동원했다. 때로는 다국적 군대와 미사일 포격이 법적 정의를 대신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석유를 놓고 도박하는 사담 후세인에게나 가능했었다.

그렇다면 의사들의 경제와 의사들의 윤리가 충돌할 때, 우리가 의지할 정의는 과연 무엇일까? 그들의 이기심을 승인해준 국민한테 휴매니티로 보답하는 것만이 스미스를 실망시키지 않는 길일 터이다.

정운영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