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조민수의 멜로 드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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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중앙돌아올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사랑의 상처를 딛고 다시 배우 본연의 자리로 돌아온 조민수. 불혹을 훌쩍 넘긴 그녀는 여전히 진한 멜로가 어울리는, 뼛속까지 여자였다.

당당한 걸음이었다.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그녀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수많은 시선에도 ‘언제나 있어왔던 일인 듯’ 여유로워 보였다. 브라운관을 벗어나 5년이란 시간을 훌쩍 흘려보낸 뒤 다시 배우라는 옷을 입고 선 자리. ‘저 배우 왜 나왔나’ ‘많이 늙었네’하는 얘기 안 들으려고,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서 ‘신경 좀 썼다’고 털털하게 내뱉는 말투로 봐선 전혀 긴장한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한 연륜 있는 배우의 내공’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사진 촬영이 있던 날은 오히려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한창 시절엔 CF 촬영이며 잡지 화보 촬영 스케줄이 줄줄이 잡혀 있는 게 당연했던 그녀, 그날은 정말로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서는 터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꼼꼼한 시선으로 훑었다.

액세서리의 위치 하나까지 디테일하게 체크하는가 하면, 컷이 바뀔 때마다 전혀 다른 느낌을 끌어내기 위해 잠시 고민의 흔적을 드러내기도 했다. 후에 들은 얘기지만 드라마 의상 하나 준비할 때도 대본 속 상황은 물론 앞모습인지 뒷모습인지, 그 모습이 어떤 느낌으로 표현되어야 하는지를 연구해 옷감의 재질까지 상의할 정도라니 그 철저함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다른 건 몰라도 일을 할 때만큼은 완벽주의가 되는 그녀, 배우 조민수가 사는 방식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여자의 사랑 방식

차춘희. 그녀는 요즘 조민수라는 이름 대신 차춘희로 살고 있는 중이다. 술 팔고 웃음도 팔면서 살았지만 평생에 사랑은 단 하나인 여자, 속없어 보이지만 안으로는 상처투성이인 여자, 아들이 전화기에 대고 불러주는 노래 한 곡에 아이처럼 마냥 행복해하는 여자, 그녀가 바로 SBS 드라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의 춘희다.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쓴 이경희 작가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선택의 이유는 충분했지만, 무엇보다 자꾸만 그런 춘희 캐릭터에 끌리더라는 그녀. 죽을 때까지 한 남자밖에 바라볼 수 없는 춘희의 사랑 방식도 이해가 됐고, 변덕스런 모습조차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컴백 작품치곤 나이도 많고 굉장히 센 캐릭터를 맡았지만, 그 모든 우려를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춘희와의 만남은 강렬했다.

“사실 처음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오랜만에 다시 나왔는데 슬며시 여성스러운 캐릭터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죠. 너무 강한 역할을 하면 이미지에 갇힐 수 있으니 복귀작으로서는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었어요. 게다가 춘희는 작부였고 지금은 다방 마담, 그럼에도 철저히 여자여야 하는데 과연 작부의 사랑은 어떨지도 잘 모르겠고, 또 내가 멜로가 될지 걱정도 되더라고요. 삶에선 거칠고 사랑 앞에서는 천생 여자인 두 가지 모습의 춘희를 어떻게 담아내야 할지도 고민됐고요. 게다가 고수의 엄마 역할이라니 너무 올드해 보이는 느낌도 부담이었죠.”

그때 답을 준 이가 바로 이경희 작가였다. 캐릭터에 대해 갈피를 못 잡고 있던 그녀에게 춘희는 여자여야 한다고, 그러니 마음껏 춘희를 여자로 만들라고 힘을 실어줬던 것. 춘희라는 인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애정에서 그녀는 ‘작가가 드라마 안에서 춘희를 버리지는 않겠구나’ 하는 믿음과 신뢰가 쌓였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대략 50~60대로 짐작되는 고수의 엄마가 되기엔 아직 너무 젊고 매력적이지 않으냐는 주변의 우려에 대해 그녀는 유쾌한 농담으로 맞받아쳤다.

“그래서 제가 현장에서 엄마라고 못 부르게 해요(웃음). 아들 같지 않고 연인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일부러 고수가 출연했다는 영화 ‘백야행’도 안 봤어요. 노출 신이 있다기에 혹시 그거 보면 다른 생각 들까 봐서요(웃음). 사실 지금 제 나이가 애매하잖아요. 젊은 배우들처럼 멜로가 주축인 것도 아니고…. 그런데 겪어야 할 일이라면 잘 겪어야죠. 지금의 이 시기를 잘 겪고 있는 이유는 나중에 나이 들어서까지 연기하는 저를 보며 사람들이 ‘괜히 나오는 배우’라는 느낌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예요. 아무거나 하는 배우라는 느낌을 주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힘들지만 버티고 버티는 거예요.”

굶더라도 생계형 배우는 되고 싶지 않은 진심

5년 만에 다시 나가본 촬영장은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드라마 제작 주체가 방송사가 아닌 외주 제작사로 바뀌면서 비롯된 변화들이 외적인 요소라면, 예전만 해도 선배들을 모시고 일하는 축에 속했던 그녀가 이제는 아래로 더 많은 후배들을 거느리는 위치가 되었다는 데 따른 내적인 변화였다.

“책임감이 커지더라고요. 드라마 촬영을 앞두고 혹시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닌가, 과연 감정 표현이 잘 될까 걱정이 많았죠. 겉으로 표현을 안해서 그렇지 제가 좀 생각이 많은 편이거든요. 솔직히 첫 촬영 날 첫 신을 찍을 때는 머릿속이 까맣더라고요. 정자에서 할아버지들에게 다방 개업 인사를 하는 신이었는데, 그 장면 지나고 나니까 좀 자리가 잡히더라고요. 저처럼 오랫동안 촬영 현장을 떠나 있었던 경험이 있는 분들 말이 오랜만에 돌아와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데 제가 참 빨리 적응했다고들 하세요.”

연기 하나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똑소리 나는 그녀. “조민수 때문에 이 드라마를 본다”며 그녀의 녹슬지 않은 연기력을 칭찬하는 시청자들이 많은데도 정작 스스로는 못마땅한 것, 부족한 것만 눈에 들어와 드라마 첫 회를 보고 무척이나 속이 상했다고 고백한다.

“예전에 어떤 배우가 ‘나 이 연기 너무 잘했어요’ 하는데 정말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얼마나 자신 있게 연기를 했으면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싶었죠. 글쎄요, 저는 잘하는 건지 어떤 건지는 모르겠어도 열심히 한다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얼마나 열심히 하면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주연에 비해 촬영 분량이 많지 않아 어떤 때는 한참 동안 촬영장에서 쉴 때가 있는데, 그럴 때조차 춘희의 감정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드라마 속에서 춘희가 불렀던 노래 CD를 들으며 일관된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고 했다. 5년의 공백을 빼고도 어느새 데뷔 20년. 그만하면 연기에 관한 내공이 쌓일 만큼 쌓였을 텐데, 일을 시작하면 일밖에 안 보이는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데, 별로 해놓은 것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우스갯소리로 그래요. 20년간 한우물을 팠으면 뭔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웃음). 연기 말고 다른 건 아무것도 못하는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될 때도 있지만, 다시 젊은 날의 저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럴 것 같아요. 남들보다 빨리빨리 턴을 못 해서 그런지 저는 일 년에 두 작품 하기도 버겁더라고요. 겹치기 출연은 시작하는 순간 지옥이었고요. 물론 다작하면서도 늘 새로운 캐릭터,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배우들을 보면 부럽기도 한데, 솔직히 좋은 배우들이 생계형으로 연기할 때는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질적으로 풍부한 것도 아닌데, 저는 굶어 죽어도 돈 때문에 연기한다는 생각은 못 하죠. 일 외적으로는 제가 어떤 취급을 받아도 상관없는데 연기하는 공간에서만큼은 최고이고 싶어요.”

겪을 일은 겪어야 한다는 인생의 진리

굴곡이 있을 수밖에 없는 배우의 삶. 그녀의 지금 위치는 다시 평행선 지점이다. 서서히 치고 올라가 다시 또 한 번의 정점을 맞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보다 지금은 지난 경험들을 통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소중하다.

“올라갔다가 뚝 떨어졌을 때의 그 느낌, 그게 너무너무 힘들었거든요. 제가 누리던 모든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다가 어느 날 바닥으로 내려왔을 때, 스스로 핑계거리가 많아지더라고요. ‘어, 나 잘했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바보 같은 생각을 많이 하는 시점이 있었어요.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리어 내 일이 귀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당시엔 힘들었던 시간이지만 겪어야 할 일은 겪어야 한다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해요.”
주연 자리에서 조연이 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겪어야 할 일’ 중 하나. 그래도 그녀는 늘 주연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맡은 배역의 스토리를 끌어가는 주인공.

“예전에 ‘피아노’라는 작품을 할 때 SBS에서 조연상 후보라며 상을 받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난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었다고. 저는 지금도 그런 마음으로 일해요. 남들은 춘희를 조연이라고 할지 몰라도, 나에게 춘희는 드라마 속에서 자신의 스토리를 끌어가는 주인공이죠.”

드라마틱했던 그녀의 인생도 이제 새로운 막이 올랐다. 배우로서 겪은 명암의 굴곡, 그리고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인생 희비의 굴곡까지 다 지나고 다시 돌아왔으니 이제 시작될 막에서는 절정을 향해 조금씩 올라가며 기쁨과 희열을 맛보는 일만 남은 셈. 그래도 조민수란 배우는 멜로드라마가 가장 잘 어울리듯이 여자 조민수도 다시 해피엔딩 아름다운 멜로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란다.

취재_박진영 기자 사진_문덕관

여성중앙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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