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등 돌리고 자기 수련만 하는 게 선비의 길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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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호 08면

성경은 말한다. “아버지의 집에는 수많은 방이 있다.” 티베트에는 승려 수만큼의 불교가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유학은 하나의 이름이 아니다. 조선의 유학, 그 하늘에서 수많은 개성들이 명멸했다. 겉으로 보이는 단일한 교조들, 그 얼음장 사이로 분출하는 내부의 열기와 역동은 뜨겁기 그지없다. 예컨대 퇴계가 수도사형이라면 남명 조식은 무사형이다. 정도전과 율곡, 다산이 정치적 책임과 자의식에 철저하다면 화담은 예술가의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 후기의 최한기는 유학을 경영과 실용의 관점에서 접근한 예외적 인물이다.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주자학의 ‘정치학’ 매뉴얼 『성학집요』<1>철학과 정치의 균열

1. 사대부(士大夫)라는 이름이 대변하듯 유교의 본령은 정치인데 위의 거장들 중 비정치적인 인물이 많은데 놀랄지 모르겠다. 역시 수기(修己)와 치인(治人) 사이에 틈이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대학』의 희망일 뿐 이들은 자동 연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조선 유학의 심리적 콤플렉스 또한 여기 있다고 일전에 언급한 바 있다.

다산은 조선의 유학이 수기(修己)에 자폐적으로 올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터럭 끝까지 썩어 문드러진 세상에” 구원의 책임을 진 선비들은 다 어디 갔는가. 다산은 불교에 탓을 돌렸다. 주자학이라 불리는 송대의 ‘새로운 유학’이 불교를 극복하기보다 오히려 거기 동화되어 버렸다는 것. “주자학은 결국 불교다.” 놀랍지 않은가. 불교를 이단(異端)으로 단죄하고, 절간을 놀이터로 만든 것이 주자학자들인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다산의 과격한 발언에는 근거가 있다. 둘 다 ‘발견’을 토대로 한 기획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불교는 자기 안의 불성(佛性)을 ‘깨닫는 것’을 목표로 주시와 성찰의 훈련을 권한다. 주자학 또한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통해 성즉리(性卽理), 즉 자신 내부의 초월성을 ‘파지’해 나가는 길을 제시했다. 역시나 흉보면서 배우고, 싸우면서 닮는다.

다산은 주자학이 이처럼 자기 내적 ‘발견’에 오로지 방점을 찍음으로써 공맹이 창도한 유교의 근본 정신, 즉 사회적 책임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다고 생각한다. 그는 ‘ 공맹의 학문(洙泗學)’을 다시금 ‘회복’하겠다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주자학의 향내적(向內的) 자기 대면의 성채를 하나하나 ‘망치로 두들겨 나갔다.’ 그 파괴의 도구는 여럿이다. 유구한 중원의 경학(經學) 전통과 실학의 선배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의, 서양의 새로운 과학과 철학 지식이 결정적이었다. 아, 여기 일본의 유학 전통도 큰 자극이 되었다는 것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2. 그럼 주자학의 정치학은 없는가. 그럴 리가? 초기에 정도전이, 후기에 개혁군주 정조가 있고, 누구보다 율곡이 있다. 당시 선비들은 두 종류였다. 과거시험을 통해 입신양명을 꾀하거나, 아니면 퇴계처럼 초야에서 자기수양에 몰두하거나였다. 율곡은 이 두 위태로운 해협을 헤치고 주자학의 수기-치인의 통합 기획을 성취한 전형이라 할 만하다. 그의 과제는 성찰과 정치의 화해, 즉 관조의 삶(via contemplativa)을 행동의 삶(via activa) 위에서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율곡은 한사코 물러나려는 퇴계의 소매를 붙들었다. “어째 혼자서만 편하시겠다고 남을 위한 책임을 저버리십니까.” 그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나아가고자 했다. 병든 몸을 이끌고 인재를 고르기 위해 사람들을 접견했고, 죽는 날에도 북쪽 변경의 오랑캐를 제어하기 위한 방략을 입으로 불러주었다.

3. 남명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신명사도(神明舍圖)’라는 그림 한 장이 마지못해 있을 뿐. “오직 전투적 자세로 마음을 외적 유혹과 내적 누출을 막아라.”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는 마음의 우주적 기원을 적고 자기 성찰과 종교적 수련을 경(敬) 한 글자로 관통시켰다. 남명은 전투적이고 퇴계는 종교적이나 그럼에도 공통점이 있다. 둘 다 관심을 오직 ‘마음’에, 즉 자기-자신과의 대면에 두었을 뿐, 유학의 나머지 반쪽인 사회적 관계나 정치적 기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이다.

율곡의 『성학집요』는 다르다. 이 책은 ‘그림’이 아니라 ‘언술’이다. 유학의 수기치인의 철인정치를 전체에 있어, 체계적으로 정리 편집한 책이다. 목차는 기획과 총론, 자신, 가정, 사회와 정치, 그리고 학문의 5부로 구성돼 있다. 사서삼경을 위시해 주자학의 난만 방대한 저작에 길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구원이라 할 만하다. 조선의 주자학은 딱 이 매뉴얼 하나면 좋았다. 그 다음부터는 군더더기이거나, 없는 것이 더 나았을 사족(蛇足)이기 십상이다.

주자학의 성공과 실패는 『성학집요』에 달려 있다. 조선의 실패를 읽으려면, 혹은 거기 작은 희망이 있는지를 보려면 이 책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과연 수기와 치인은 연속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조건과 방법은 무엇일까. 실패할 수밖에 없다면, 일본의 고학(古學)파 오규우 소라이(狄生<5F82>徠·1666~1728)가 제안하듯, 수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 말고 다만 통치자의 의장으로 삼아야 할까, 아니면 현실정치가들처럼 수기 따위는 거추장스러우니 그만 떼버리는 것이 상책일까. 그렇다고 이 ‘현실적인, 너무나 현실적인’ 세태에 등을 돌리고 홀로 수기에만 올인하는 것이 길일까. 그 지나친 몰입은 혹시 현실을 도외시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든 고립아, 뜻은 크되 손발이 따라주지 않는 무능자, 아니면 공허한 명분으로 세상을 향해 소리만 질러대는 이념 과잉의 도덕가만 키우는 것은 아닐까.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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