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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혹적이면서 무시무시한 팜므 파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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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호 08면

1 영화 ‘순수의 시대’ (1993)의 한 장면

19세기 후반, 뉴욕 명문가의 준수한 자제이자 변호사인 뉴랜드 아처는 비슷한 집안의 아름다운 메이 웰랜드와 모든 조건이 잘 맞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그들 앞에 메이의 사촌 엘렌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 나타난다. 그녀는 유럽으로 시집갔다가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을 떠나 미국으로 되돌아온 것인데, 그것만으로도 보수적인 뉴욕 상류사회에서 은근한 냉대를 받는다. 게다가 엘렌은 당시 금기시된 정식 이혼을 할 생각이다. 이혼이 집안 망신이라고 생각하는 그녀의 가문은 결사 반대하며, 뉴랜드가 그녀를 설득하도록 한다. 하지만 뉴랜드는 꽉 막힌 사회와 외로운 싸움을 하며 자유로운 정신을 보이는 엘렌에게 감탄과 동정을 느끼게 되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데….

문소영 기자의 대중문화 속 명화 코드 : 유혹하는 환영, 스핑크스

이렇게 진행되는 퓰리처 수상 소설 ‘순수의 시대’(1920)를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영화화(1993)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고 한다. 주로 현대 뉴욕의 암흑가에서 펼쳐지는 폭력적인 인간사를 그리던 감독이 우아한 옛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니까 말이다. 이에 스코세이지는 그러한 사회의 고상한 격식과 질서가 개인의 감정에 가하는 미묘한 폭력과 잔인성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

2 예술, 또는 스핑크스의 애무 (1896), 페르낭 크노프 (1858~1921) 작, 캔버스에 유채, 50.5 x 151㎝, 벨기에 왕립 미술관, 브뤼셀

스코세이지는 그 의도를 주로 영상을 통해 훌륭하게 성취해냈다. 당시 상류 가정의 화려한 인테리어와 테이블 세팅 등이 숨이 막힐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된 영상은, 눈을 호강하게 하기도 하지만, 그 모든 우아하고 잘 정돈된 것들이 가하는 압박도 느끼게 한다. 그 와중에 몇몇 디테일은 이 질서에 저항하는 엘렌과 뉴랜드의 심리를 대변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벽에 걸린 그림들이다. 뉴랜드의 집을 포함한 여러 대저택에는 당대 인기화가였던 제임스 티소와 로렌스 앨머-태디머 등의 유쾌하고 온건한 그림들이 걸려 있다. 하지만 엘렌의 집 벽난로 위에는 아주 기묘한 그림이 하나 걸려 있다. (사진1) 표범의 몸과 여인의 얼굴을 지닌 존재가 한 청년에게 다정하게 뺨을 비비고 있는 그림 말이다.

3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1864), 귀스타브 모로 (1826~1898) 작, 캔버스에 유채, 206.4 x 104.8㎝,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이 그림 원작(사진2)은 벨기에의 상징주의(Symbolism) 화가 페르낭 크노프(1858~1921)의 작품인데 ‘예술’이라고도 불리고 ‘스핑크스의 애무’라고도 불린다. 그렇다면 이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스핑크스와 그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낸 영웅 오이디푸스란 말인가? 오이디푸스가 본의 아니게 어머니와 관계를 맺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낳긴 했지만, 스핑크스와 야릇한 관계였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사실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그림들은 신화에 충실하게 둘이 멀찌감치 떨어져 살벌한 표정으로 수수께끼를 내고 푸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상징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모로(1826~1898)가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유혹하듯 쳐다보는 충격적인 그림 (사진3)을 들고 나온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부릅뜬 눈과 장대를 힘주어 잡은 손은 유혹에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이 그림에서 스핑크스는 19세기 후반 예술계를 휩쓴 테마인 팜므 파탈(femme fatale), 즉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남성을 흔들어 그 운명을 좌우하는 위험한 여성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염한 노래를 부르는 인어를 팜므 파탈로 등장시키는 것은 이해가 가도, 절벽에 앉아서 무뚝뚝하게 수수께끼나 내는 스핑크스를 팜므 파탈로 등장시킬 생각을 했다니 참 이상하다. 아마도 당대의 인류학자들이 스핑크스를 원시시대의 강력한 여성상과 결부시킨 데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스위스의 인류학자 요한 바호펜(1815~1887)은 그의 저서 『모권』(1861)에서 인류가 원시 모가장제로 시작해서 후에 가부장제로 옮겨갔다는 가설을 내놓으면서 강력한 스핑크스가 모가장제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스핑크스의 유명한 수수께끼 “아침에는 네 다리로, 낮에는 두 다리로, 밤에는 세 다리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냐”는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인간 생로병사의 함축이다. 원시 모가장제 사회에서는 여성이 이러한 생명과 자연의 비밀을 독점했는데, 오이디푸스가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것은 그 독점이 깨졌다는 것, 그리고 모가장제의 몰락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설을 바탕으로 현대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이 스핑크스를 그렸다면 좀 더 장엄한 모습으로 그렸으리라. 하지만 19세기 말의 남성 화가들은 그 가설에서 원시의 강력한 여성상이 남성에게 주는 불안감, 그리고 혐오와 성적인 끌림이 뒤섞인 감정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모로 이후로 여러 화가들이 스핑크스를 고혹적이면서 무시무시한 팜므 파탈로 그렸다.

그런데 크노프의 그림(사진2)은 이런 팜므 파탈 스핑크스 그림들 중에서도 특이한 데가 있다. 이 작품에서는 성적 긴장감이 그리 강렬하지 않고 그림 전체가 오히려 좀 나른하면서 신비롭다. 그 이유는 두 인물이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뺨을 맞대고 있는 데다가, 그 두 인물의 얼굴이 많이 닮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미술사가 마이클 깁슨은 이 그림의 남자가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크노프의 자아를 반영한 예술가라고 보았고, 이 스핑크스는 예술가 자신이 만든 환영이자 분신이라고 보았다. 여기에서 스핑크스는 다정하지만 여전히 위험한 존재다. 예술가가 자신이 만든 환영의 다정함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그는 현실과 괴리되어 환영에 먹혀버리는 신세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핑크스 얼굴의 모델이 크노프의 여동생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화가는 거의 모든 그림에서 여동생을 모델로 삼고 있어서 그 기묘한 애착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이 그림에서 남자가 화가 자신이고 스핑크스가 여동생이라면, 그는 여동생을 자신의 여성적 자아이자 분신으로서 사랑한 것일까?

다시 영화 ‘순수의 시대’로 돌아가서 이 그림이 나오는 장면(사진1)을 보면 뉴랜드(대니얼 데이 루이스)는 예술가 쪽에 서있고 엘렌(미셸 파이퍼)은 스핑크스 쪽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엘렌은 통념적인 팜므 파탈과는 다르고 둘의 관계에서 더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쪽은 뉴랜드다. 하지만 엘렌은 사회의 관습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강한 영혼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스핑크스에 비길 수 있고, 뉴랜드는 그런 그녀에게서 자기 자신의 반항적인 면을 발견하지만 여전히 관습과의 사이에서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는 점에서 우울하고 멍한 표정을 한 그림 속 남자에 비길 수 있다. 스코세이지의 섬세한 장면 연출이 돋보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중앙데일리 경제산업팀 기자. 일상 속에서 명화 이야기를 찾는 것이 큰 즐거움이며, 관련 저술과 강의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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