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시론…경제 진단] 정부 신뢰회복이 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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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경제가 흔들리며 국민 불안 심리가 확산되고 있다. 블랙 먼데이로 시작된 위기 상황은 외적 요인인가, 자초(自招)한 결과인가.

그 대책은? 관계전문가들의 긴급진단을 통해 원인 분석과 대안을 모색한다.

경제정책이 시장의 신뢰를 잃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정책의 내용이 어긋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정책의 집행능력이나 의지에 대한 불신이다. 현재의 정부정책이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데는 이상의 두 요인이 모두 작용하고 있다. 그만큼 정부의 신뢰회복이 쉽지 않다는 얘기도 된다.

경제정책의 큰 틀에 의심이 가는 판에 단편적인 처방이 먹힐 리 없다. 고유가나 반도체와 같은 악재를 탓하지만 그런 문제는 오래 전부터 예상됐던 것이 아닌가.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거시지표도 좋고 외환보유고도 많은데 왜 이 난리냐고 서운해 하지 말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남의 말도 한번 들어봐야 한다.

당장의 거시지표가 좋다고 해서 거시정책 역시 건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 경제의 가장 큰 취약점은 경제구조의 불균형에서 오는 불안정 요인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경제가 성숙할수록 산업별로 경기순환의 시차가 달라 완충작용을 하는 측면이 있는 법인데, 우리는 반도체 가격이 떨어지면 나라가 흔들린다. 경제력이 소수 재벌에 집중돼 있으니 총수 한두명의 그릇된 판단에 경제불안이 조성된다.

이런 와중에 자의건 타의건 금융시장의 개방까지 가속화됐다. 그만큼 거시불안 요인이 커진 것이다.

위기진정 후의 거시정책 기조는 '안정 없이 성장 없다' 라는 큰 틀에서 출발했어야 했다. 유휴시설과 실업자가 많은 상태에서 돈을 풀고 금리를 낮춘 정책은 잘한 것이다.

그러나 외부 충격에 취약한 경제구조를 인식해 고속성장보다는 안정성장에 비중을 두고 경기의 골을 메우는 조정작업에 충실했어야 했다.

투기자본이 날뛰는 세상에서 외국자본을 구세주처럼 떠받든 일, 제 발로 몰려드는 벤처와 코스닥에 정부까지 발벗고 나선 일, 더 걷힌 세수로 재정안정을 취하기보다는 생색나는 지원책에 앞장선 일 등 되짚고 넘어가야할 사안이 한 둘이 아니다.

물론 위기 초기에 급한 외자를 구해오고, 창업지원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고, 정부가 빚을 내서라도 어려운 사람들을 지원한 것이 나빴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 다음 단계에 있었다. 새로운 충격이나 악재를 대비해 경제의 완충지대를 준비하는 방향으로 거시정책은 한발 앞서나가야 했다.

나아가 지속적 성장의 기틀을 위해 새로운 경쟁력의 원천을 찾아 나서는 일도 병행해야 했다. 그런데 경기상승과 환율절상의 당연한 귀결인 수입증가를 탓하는 목소리만 들리지, 우리의 생명줄인 수출을 촉진할 새로운 산업정책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시장경제의 틀을 잡기 위한 구조조정 작업은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좋은 시작을 보였다. 사실 높은 실업률을 감수하며 금융개혁의 기틀을 세운 것은 외환보유고를 꾸준히 축적해온 일과 함께 현 정부가 가장 잘한 일이다.

문제는 이러한 소중한 이니셔티브가 거시경제에 대한 그릇된 정책판단의 희생물이 돼 추진력을 잃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구조조정은 모든 부실을 정부가 떠안는 것이 아니다. 초기에는 과감한 자금투입으로 금융기관의 자생력을 회복시키고, 다음 단계에서는 건전한 감독규제에 치중하는 것이 순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부실은 곧 공적자금이라는 가당치 않은 공식이 떠돌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재벌개혁의 핵심은 경제력 집중의 완화를 가져올 경쟁정책과 대주주의 독선과 무능이 경제전반의 비효율로 전파되지 않게 하는 지배구조의 틀을 짜는 데 있다.

정부가 재벌을 일일이 맞상대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빅딜이나 대우 및 현대사태가 생생히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지금 시장이 냉담한 것은 어제 오늘의 현안 탓이 아니라 그동안 쌓여온 불신의 골이 깊기 때문이다.

정책에 실수도 있는 법이다. 시장불안을 외부악재 탓으로만 돌려서야 누가 정부를 믿겠는가. 거시환경 변화에 대응 못한 정책부재와 구조조정의 초점 상실을 시인할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시장에 끌려다니는 단편적인 대책이 아니라 정부가 진정으로 경제와 민생을 생각하는지에 대한 확신인 것이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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