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바리케이트를 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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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최근 취재차 방한한 한 외국 기자가 크게 보아 두 가지 점에서 한국 정치는 2차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 정치를 닮아가고 있다며 흥미있는 지적을 했다.

하나는 끊임없는 변화와 혼란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이익을 철벽처럼 요새화하려는 바리케이드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모습에서 하루 빨리 해방되려면 샤를 드골 대통령과 같이 과감하게 자신의 바리케이드를 해체하고 커뮤니케이션을 확대해야 한다고 훈수까지 두었다.

프랑스의 정치인들은 영국이나 미국 정치인들과 달리 자신들의 둥지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외부로부터의 설득을 거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두 사람이 모이면 정당이 생겨나고 세 사람이 모이면 헌정 위기가 발생한다" 는 유행어까지 생겨났다.

2차 세계대전 후 16년간 프랑스의 행정 내각은 평균 8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변화를 시도하면 할수록 더욱더 혼란과 바리케이드의 과거 정치 패턴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바로 우리 정치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현상과 너무 흡사하다. 정당의 이합집산과 합종연횡에 따른 정치혼돈이 우리 정치의 고유한 이미지로 정착된 지는 오래다.

여야 대치의 바리케이드 정치 또한 우리 정치의 변함없는 이미지임을 부인할 사람도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잦은 내각 개편과 정책혼선에 따른 혼란스러운 국정의 모습도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정치적 혼란의 일차적 원인은 지역감정을 비롯한 연고주의의 바리케이드다. 오랜만에 사람들 모이는 데 가보았더니 영.호남 사람들이 함께 모이면 사석에서도 토론이 중단된다고 한다.

국민의 정부 들어서서 영.호남간에는 바리케이드가 더욱 요새화해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점점 줄어들고 대신 각 바리케이드 내부에서만 커뮤니케이션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바벨탑의 수학' 인 것이다. 영.호남 사람들이 같은 컴퓨터를 쓰고 있으면서도 자기들 내부 커뮤니케이션에만 몰두하다보니 서로의 프로그래밍 방식이 점점 알아볼 수 없게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리케이드를 걷어내고 정치적 혼란과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는 일차적 책임은 대통령에게 있다.

우리는 지금 실수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교정할 수 있는 유연한 대통령의 정치적 대응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외부로 부터의 설득에 담을 쌓고 자신의 바리케이드를 더욱 요새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백년 전 레닌은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악마와도 동침하겠다" 고 말했다. 이 말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金대통령은 오월동주(吳越同舟) 같은 자민련과의 동맹으로 정권을 쟁취했다.

또 북한 정권과의 동맹을 통해 냉전 바리케이드를 걷어내며 권력기반을 확대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적과의 동침도 서슴지 않는 대통령이 민심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지나치게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단일 목표 추구에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바리케이드들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80%가 넘는 10대와 20대의 젊은 세대들이 통일에 무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소득 격차의 심화로 대북 경제지원에 족쇄가 채워지고 있지 않은가.

이러다가는 몇 년 후에 대통령이 그토록 공들인 통일 이슈가 정치적 아젠다에서 빛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단일 목표에 집착하면 혁명을 할수록 과거 중국의 황제로 변모해간 마오쩌둥(毛澤東)이나 개혁을 할수록 과거의 경직된 권위주의 패턴으로 돌아간 전임 대통령들의 실수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러한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도 대통령은 자신의 바리케이드를 먼저 열고 커뮤니케이션을 확대해야 한다.

모파상은 자신이 프랑스 사람인 것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혼란과 바리케이드의 이미지 못지않게 프랑스는 항상 혁명과 변화, 그리고 사랑의 원천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모파상처럼 지금의 내 조국을 개혁과 변화, 그리고 사랑의 진원지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는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장달중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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