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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시장 평민 주주들, 주식 매집해 양반 사장 몰아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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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920년대의 광장시장. 18세기 이후 동대문 안 배우개(梨峴·이현)는 ‘도성 삼대시’의 하나였는데, 광장주식회사는 이 자리에 창고와 상점 건물을 지어 근대적 시장을 설치했다. 이후 ‘동대문시장’으로 불린 이 시장은 현재까지도 남대문시장과 함께 서울 재래시장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출처=『신세계 25년의 발자취』)

1897년 1월, 서울에 최초의 근대적인 도시 상설시장이 만들어졌다. 그 전 해 가을부터 한성부는 종로와 남대문로에 늘어서 있던 상업용 가건물들을 철거하여 도로 폭을 넓히는 사업을 추진했다. 이들 가건물을 ‘가가(假家)’라 했는데, ‘가게’는 이 말이 변한 것이다. 이 사업에 따라 당장 가가에서 장사하던 영세 상인들의 생계가 막막해졌다. 정부는 이들에게 남대문 안의 선혜청 창고를 새 장사터로 내어 주었다.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지금의 충무로와 명동 일대에 몰려 살던 일본인들이 남대문시장에 눈독을 들였다. 통감부가 남대문시장을 빼앗아 일본인들에게 넘길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이 사실로 바뀌지는 않았지만, 긴장한 한국 상인들은 대안을 마련하느라 부심했다. 그 과정에서 개천(당시에는 ‘청계천’이라는 이름이 없었다) 광교에서 장교에 이르는 구간을 판자로 덮어 그 위에 새 시장을 만드는 방안이 나왔다. 광교에서 장교까지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광장(廣長)시장’이라 했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그해 가을, 큰비가 내려 공사용 자재가 모두 유실되었다. 개천 위에 시장을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회사 임원들은 사명(社名)을 ‘광장(廣藏)주식회사’로 바꾸고 시장 터를 동대문 안 ‘배우개’로 변경했다. 이렇게 해서 1905년 겨울에 두 번째의 근대적 도시 상설시장이 출현했다. 오늘날 동대문시장의 기원(起源)이다.

광장주식회사도 그 무렵의 다른 대다수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양반들이 자본을 대고 상인들이 경영 실무를 책임졌다. 그런데 1912년 1월 14일, 광장주식회사 주주총회에서 평민 주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총무 홍충현이 박승직·김한규·김용집 등의 상인들을 중역 자리에 올리고 사장 김종한을 해임해 버렸다. ‘남작’ 김종한을 비롯한 양반 중역들은 이들의 불손한 언사와 모욕적인 조처에 분노했지만 당시 양반 중역들의 소유 주식은 전체 주식의 20%에 불과했다. 귀족들이 사장 명함에만 신경 쓰는 사이에 평민들은 조금씩 주식을 모아 두었고, 결국 쿠데타에 성공했다.

오늘날 한국인의 절대 다수는 자신이 무슨무슨 씨 무슨 공파 몇 대손이라고 믿는다. 세계사적으로도 특이한 이 엄청난 집단적 착각이야말로 한국 사회를 발전시킨 동력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양반 상놈 따지는 문화가 사라진 지 고작 한 갑자 만에, 여러 면에서 현대적 신분제가 재탄생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경계할 일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