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화는 일등 국가용, 꼴찌에겐 가혹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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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울프(64)는 경제 칼럼니스트의 대명사다. 분석·통찰·비전을 골고루 갖췄다는 평이다. 그가 중앙SUNDAY 지면을 통해 한국 독자와 만난다. 육중한 몸매와는 어울리지 않을 듯한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그는 도그마나 이데올로기보다는 사실주의를 바탕으로 경제 현안을 해부한다. 울프는 1971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학 연구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세계은행에 들어가 경제분석가로 81년까지 일했다. 이후 런던에 있는 무역정책연구소(TPRC)에서 6년 정도 일하다 87년 파이낸셜 타임스(FT)로 자리를 옮겨 ‘저널리즘 이코노미스트’로 변신했다. 현재는 부국장급 수석 칼럼니스트다. 그는 뛰어난 칼럼 덕분에 2000년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 2단계 전인 CBE(Commander of the British Empire)를 받기도 했다.

마틴 울프 파이낸셜 타임스 수석 논설위원


금융위기 와중에 유로(euro)화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유럽 이곳저곳은 외환위기에 시달렸을 것이다. 아일랜드·그리스·이탈리아·포르투갈·스페인 등의 통화 가치가 급락하고 달러 자금이 썰물처럼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을 게 분명하다. 유로화를 처음 만들어낸 사람들의 꿈이 이뤄진 셈이다.

그러나 세상 일에는 기회비용이 들기 마련이다. 국가 간에 환율이라는 조절장치가 없으면 다른 장치가 있어야 한다. 유로사용지역(유로존) 주변부의 경제가 중심국에 맞춰 조절돼야 한다. 그리스 등의 경제 정책 담당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질이 우수한 상품을 수출하는 독일에 맞춰 인플레이션을 억제해줘야 한다.

위기 이전인 2006년 유로존 내부는 대체로 균형 상태였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독일이 막대한 흑자를 기록했다. 1960억 달러나 된다. 그해 독일 국내총생산(GDP)의 6.5% 수준이다. 이웃인 네덜란드는 GDP의 9.4% 수준인 640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반대로 스페인은 GDP의 9%에 해당하는 1110억 달러 적자를 봤다. 전문가들은 단일 통화권 내에서 지역별 경상수지 적자나 흑자는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영국 랭커스터와 요크셔 지방의 적자가 영국 전체 경제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듯이 말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 나라 안에서는 사람들이 수월하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국경을 넘어서는 일은 훨씬 힘들다.


경상수지 적자인 나라는 다른 나라에 빚을 지기 마련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 나라의 채권을 무더기로 팔아치우거나 상환을 요구하고 나서면 어떻게 될까. 결과는 심각한 경제 불안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경상수지 적자 국가인 스페인 정치 리더들은 실직자들에게 다른 나라 사정이 더 어렵다고 말하며 실직자들을 달래기 힘들다. 정치 리더들이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문제는 ‘어떤 해결책인가’다.

금융위기 이전 유로존의 주변부에서는 총수요가 총공급보다 컸다. 2006년 당시 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의 민간 부문은 번 돈보다 훨씬 많이 썼다. 독일·네덜란드 민간 부문은 번 돈 가운데 상당 부분을 쓰지 않고 저축했다. 유로존 내 불균형이다. 악마처럼 금융위기는 가장 취약한 곳을 강타했다. 번 것 이상으로 쓴 나라들이다. 궁지에 몰린 과소비 지역은 허겁지겁 허리띠를 졸라맸다. 2006~2009년 사이에 아일랜드·스페인·그리스의 총소득과 총지출의 차액이 급격히 출렁거렸다. 그 후폭풍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경제가 침체에 빠져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는 경제 전문가들이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 꺼리는 한 가지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바로 민간 부문의 소득-지출 균형이 깨지면 국가의 재정 균형도 무너진다는 점이다.

유로존 내부의 불균형은 2000년 이후 10년 동안 이어졌다. 호황 시절 민간 부문은 씀씀이를 줄이지 않았다. 위기가 엄습하자 불균형이 심각한 문제로 불거졌다. 민간 부문이 심하게 충격 받았다. 공공 부문의 신용도도 추락했다. 이는 유로존 국가들의 국채 수익률 차이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중앙은행들이 돈을 푼 바람에 국채와 회사채의 수익률 차이(스프레드)가 크지 않지만 나라별 국채 수익률 차이는 예외적으로 벌어졌다. 독일 10년 만기 국채(분트)와 그리스 국채 수익률 차이가 2.74%포인트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다.

세계적인 금융버블 이론가인 고(故) 찰스 킨들버거 MIT 교수는 나라들이 서로 교역하는 상황에서 헤게모니를 쥔 한 나라가 꼭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로존에서는 독일이 헤게모니를 쥔 나라 구실을 하고 있다. 독일은 글로벌 패권국가인 미국처럼 채무자가 아니다. 독일은 앞으로도 채권자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요즘 유로존의 주변부는 구조적인 침체를 겪고 있다.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고 있다. 조만간 고통을 감수하고 재정지출을 대거 줄이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주변부는 통화가치를 가파르게 떨어뜨리는 카드를 쓸 수 없다. 금융통화정책 주권이 유럽중앙은행(ECB)에 넘어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경기침체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버블이나 호황 시기에도 주변부는 환율을 유리하게 조절하지 못해 수출 경쟁력을 잃기도 했다. 한마디로 경기 대응 능력이 없다는 얘기다. 유로 시스템의 고질병이다.

ECB의 기준금리는 유로존 전체 경제 수준을 감안해 결정됐다. 주변부 기준에서 보면 아주 낮은 수준이었다. 이들 나라의 인플레 수준은 상당하다. 그만큼 실질 금리가 낮았다. 유로 가치가 수입을 억제할 만큼 낮지도 않았다. 버블로 주변부 수요가 급증했다. 수출보다 수입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경상수지가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수요 때문에 독일 등 중심부가 과잉 생산한 제품과 서비스가 소화됐다. 유로존 중심부는 글로벌 차원에서도 상당한 경쟁력을 갖췄다. 덕분에 유로존 전체가 경상수지 흑자를 낼 수 있었다. 당연히 달러 등과 견줘 유로의 가치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반면 유로존 변방국은 역내 국가뿐 아니라 역외 국가들과의 교역에서도 적자를 볼 수밖에 없었다. 덫에 걸려 있는 셈이다.

주변부는 금융통화정책 수단이 없기 때문에 요즘 궁지에 빠져 있는 민간 부문을 되살려낼 수도 없다. 재정적자를 계속 감당할 체력도 없다. 현실적으로 국민을 역내의 잘사는 나라로 이전시킬 수도 없다. 부유한 중심부에서 이민을 받아들이면 도움이 될 수는 있다. 장기 침체가 주변부 국가들의 명목 소득 감소를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다. 실제로 아일랜드는 장기 침체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스페인과 그리스는 아직 아니다.

주변부는 디플레이션 고통을 겪어야 한다. 명목 가격과 임금이 하락하는 바람에 유로화로 표시된 부채의 무게는 나날이 무거워지고 있다. 그만큼 민간과 공공 부문의 채무불이행(디폴트)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우연이 아니다. 유로 시스템 자체의 고질병이다. 주변부는 덫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야 한다. 유로존 내부에서는 도와줄 세력이 거의 없다. 최후의 소비자 구실을 해줄 국가나 기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로 가치는 너무나 높다.

출범 초기부터 유로화가 최적의 통화인가를 두고 수많은 전문가들이 논쟁을 벌였다. 최근 위기를 통해 유로화는 최적의 통화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오히려 문제 덩어리인지를 따져봐야 할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