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아직도 고위층 사칭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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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한빛은행 서울 관악지점이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거액을 대출해 주었다가 검찰수사의 도마에 올랐다.

총 대출금액이 4백억원을 넘는데다 사건 관련자 중 한 명은 그동안 자기가 '현직 장관의 친척' 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한다.

현재까지 수사진전 상황을 볼 때 거명된 장관이 대출외압 같은 데 개입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 다른 고위층 사칭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단순 사기사건이라 치더라도 이런 유의 '고위층 업기' 가 아직도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할 수 있다는 현실이 너무 한심하다. 이런 구악적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서도 철저한 수사와 진상공개가 필수적이다.

사건 당사자들은 현직 장관을 내세워 대출받은 것도, 그 때문에 대출해 준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출을 부탁한 사람이 '장관의 동향 친척' 이라고 말해 온 데다 동생이 올 봄까지 청와대에 근무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식적으로 '배경설(說)' 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소지도 있다.

더구나 구속된 한빛은행 지점장은 지점장 독단으로 대출해 줄 수 있는 한도액 3억원을 편법으로 초과해 장관 친척이라는 기업인에게 1백억원 이상을 내주었다.

한빛은행이 도대체 지금 어떤 상태인가. 이미 거액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데다 2차 구조조정 대상에 올라 뼈를 깎는 경영개선 노력을 펼쳐도 부족한 실정이다.

지난 상반기에도 '돈장사' 에 실패해 적자를 면치 못했다고 불과 며칠 전 발표됐다. 본점 여신협의회 심사를 거치지 않은 거액 대출을 뒤늦게 발견해 자진해 검찰에 고발조치했다지만 은행측은 여신업무에 '구멍' 이 여전하다는 사실만 입증한 꼴이 됐다.

사실상 국민 부담인 공적자금이 투입된 은행에서 아직도 이런 불법대출이 자행된다니 은행의 구조조정이란 한갓 공염불에 지나지 않음을 실감한다.

특히 추석을 앞두고 중소 기업들이 심각한 돈가뭄을 호소하는 판에 수백억원이 이런 식으로 건네지고 여기에 고위층 관련설까지 보태지니 힘 없는 사람은 살 수 있느냐는 자포자기의 푸념만 나올 수밖에 없다.

현 정부 들어 지난해 10월까지 청와대를 사칭한 사기사건만 총 26건으로 지난해 국정감사 때 밝혀졌다.

대통령 가족부터 수석비서관에 이르기까지 피해 고위층도 다양하다. 이번 사건에 관해서도 검찰의 수사 착수 이전에 금융계에선 벌써 갖가지 형태의 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

이런 고위층 사칭 소문이 일기 시작하면 사태가 크게 번지기 전에 이를 차단하는 적극적 노력을 보여야 한다.

의혹을 씻는 데는 철저하고 공정한 수사 및 발표가 최선이다. 이번 한빛은행 대출사건도 고위층 사칭이 빚은 대출사고라면 여타 은행들도 비슷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내부 심사.감시장치를 철저히 점검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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