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남북협상은 투명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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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가 경협추진위를 장관급 기구로 격상하는 등 대북관계 정부조직을 정비했다. 이는 남북문제가 이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깜짝 출현이나 이산가족 상봉의 눈물바다 등 감성적 이벤트에서 실질적인 경협문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조치일 것이다.

이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북지원 정책이 국민적 합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북협상의 과정이 투명해야 하며 정부가 남북협의의 진실을 왜곡하거나 감추는 구석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통일부측은 엊그제 비전향 장기수 송환명단을 북측에 통보했는데 북측이 전향자와 장기수 가족들을 제외한 명단을 별 말없이 수용한 것처럼 발표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북측은 모든 송환 희망자의 무조건 송환을 요구한 전통문을 보낸 사실을 공개해 통일부 주장이 허위임을 밝혔다.

최근 대북관계에 관한 잇따른 정부 고위층의 발언도 문제다. 김대중 대통령은 얼마 전 CNN과의 회견에서 경의선 철도를 추석 직후 착공하기로 '합의'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합의가 어디서 어떤 경로로 이뤄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비전향 장기수의 송환도 금강산 적십자회담에서 9월 초에 논의하기로 했을 뿐 정확한 날짜가 잡히지 않았었다.

그후 송환일자가 9월 2일로 정해졌다는데 적십자 실무자회담에서는 송환일자를 협의한 적이 없다고 한다.

김용순 북한 아태평화위원장이 추석 직후 서울을 방문키로 한 것도 金위원장의 발설로 드러난 것이지만 이 역시 어떻게 합의됐는지는 알 수 없다.

최근 일본을 방문한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은 29일부터 열릴 장관급 회담에서 군사직통전화 문제가 '합의' 될 것이라고 사전예고했다.

이렇게 되면 장관급 회담이나 적십자회담은 껍데기에 불과하고 정부는 다른 비밀창구를 통해 북측과 협의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남북문제 같은 미묘하고 조심스런 문제에 있어 비공식적.비공개적 협의의 필요성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모든 것이 비밀협상을 통해 이뤄지고 그 정보를 정부가 독점해버리면 국민은 도무지 무엇이 진행되는지를 모르게 된다.

예컨대 경의선 철도 연결공사에 들 자금규모는 얼마며 어떻게 조달될 것인지, 군사분계선은 어떻게 처리하며 안보상의 허점은 없는지, 미군과의 협의는 어떻게 진행되며 정전협정상 문제들은 어떻게 극복되는지 하는 것들은 국민이 알아야 할 문제들이다.

여기엔 긴장완화나 경제적 부담 등 매우 현실적 문제들이 포함돼 있다. 그 모든 것을 '민족사적 행사' 니 '철의 실크로드' 니 하는 화려한 수사(修辭)만으로 묻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정부는 조직정비도 좋지만 우선 대북 비밀협상의 내용과 진행상황을 진실되게 국민에게 보고하고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밟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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