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론 공영 속으론 이윤, MBC의 이중성 낳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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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위원장 이영조)는 7일 신군부의 1980년 언론통폐합이 위법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신군부는 동양방송(TBC TV·라디오)은 없애고, MBC는 바꿨다. 방송공영화와 재벌의 신문방송 운영 금지가 명분이었다. 기업이 소유한 방송사의 모든 지분은 KBS로 넘어갔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9시 뉴스를 알려드립니다. 뚜 뚜 뚜~.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 오후 ○○○에 참석, 관계자들을 격려한 뒤…”로 시작되는 ‘땡전 뉴스’는 85년 2·12 총선, 87년 6·29민주화 운동을 거치며 사라졌다. KBS1·KBS2·MBC 등 3개뿐이던 텔레비전 방송채널은 케이블·위성TV의 등장에 따라 수십 개로 불어났다.

80년대, 3S·땡전 뉴스

MBC 여의도 사옥 전경.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으로 MBC는 민영에서 공영으로 바뀌었지만 최근 광우병 파동 등을 거치며 신뢰도가 추락하고 있다. [중앙포토]

언론통폐합의 모델은 나치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치의 선전계몽부 장관 괴벨스는 신문편집지침법을 제정, 히틀러에게 동조하지 않는 신문1000여 개를 폐간했다. 보도지침을 통해 언론을 권력의 충실한 시녀로 만들었다. 이 언론관은 30년대 군국주의 일본에서 재현됐고 80년 다시 한국에 등장했다. 79년 10·26, 12·12 사태,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으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는 언론통폐합을 단행했다. 민영방송 MBC와 지역 MBC 21개사가 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공영방송 MBC의 탄생이었다. 호남 출신인 경향신문·문화방송 이환의 사장은 영남 출신인 이진희 사장으로 바뀌었다. 이진희 사장은 후에 문화공보부 장관(82년), 반공연맹이사장(85년)을 거쳐 서울신문 사장(86년)까지 역임한다. 국민의 눈과 귀를 막은 정부는 스포츠와 오락·연예 프로그램을 강화해 국민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 했다. 일명 ‘3S(Screen·Sex·Sports)정책’이었다. 81년 시작한 컬러TV 전국 방송은 시청자들에게 총천연색 화면을 선사했다.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국민 불만을 희석하는 효과를 노렸다. 배우와 가수들의 분장과 의상도 화려해졌다. 81년 12월 삼성·롯데·MBC·OB·해태·삼미 등 6개 구단을 회원으로 하는 프로야구 창립총회가 열렸고, 82년 3월 전두환 대통령의 시구로 삼성과 MBC의 개막전이 시작됐다. 전 국민은 TV로 프로야구를 즐기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90년대, 드라마 왕국 MBC
‘사랑과 야망’(87년) ‘사랑이 뭐길래’(91년) ‘질투’(92년) ‘사랑을 그대 품 안에’(94년) ‘일요일 일요일 밤에’(89년 시작)…. 90년대 MBC는 전성시대를 맞았다. 드라마 왕국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이때다. 국영 KBS에 비해 운신의 폭이 자유로웠던 MBC는 드라마와 쇼 프로그램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공영방송이지만 연예·오락 프로그램이 지나치게 선정적이란 비판도 나왔다. 민영방송 SBS가 91년 출범했지만 10여 년간 독점적 지위를 누려온 MBC의 아성에 도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민주화 열망에 발맞춘 사회 고발 프로그램과 뉴스 프로그램도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MBC의 간판 앵커인 정동영·엄기영씨는 국민적 스타로 떠올랐다. 92년 벌어진 일명 ‘방송 민주화 투쟁’은 앵커 손석희를 민주투사로 부상시켰다.

이후 MBC 노조의 힘은 갈수록 강해졌다. MBC 노영화 논란이 본격화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MBC 관계자는 “주인 없는 거대 회사 MBC의 리더십은 실질적으로 노조가 장악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노조는 보도국장·임원 등 주요 보직 인사에 영향력을 미쳤다. 또 다른 관계자는 “주요 임원뿐 아니라 사장을 선임할 때도 노조의 묵시적인 동의가 필요하다. MBC 내부에선 그 누구라도 노조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전국적인 민주화 요구에 88년 정부는 KBS가 갖고 있던 MBC의 지분을 ‘방송문화진흥회’라는 기구로 이관했다. 외형적으로는 공영방송 체제를 갖춘 셈이지만 실질적인 회사의 운영은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주식회사 MBC’의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기형적 구조가 고착화됐다.

2000년대, 추락하는 뉴스데스크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MBC 보도는 더욱 정치색을 띠기 시작했다. 상당수의 보도 프로그램들이 친노조 친정부적 성향으로 기울었다. MBC 앵커 출신인 정동영·박영선씨는 집권 여당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다. 2005년에는 노조위원장을 지낸 최문순씨가 MBC 사장에 선임됐다. 최 사장은 사장 임기를 마친 직후인 2008년 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하지만 MBC의 간판 프로그램인 ‘뉴스데스크’의 시청률은 2000년을 전후로 하락하기 시작했다. 80년대 후반까지도 KBS에 비해 10% 이상 높던 9시 뉴스데스크의 시청률은 점점 떨어져 결국 1위 자리를 내주었고, 2005년에는 한 자릿수로 내려앉았다. 1억원이 넘는 직원들의 평균 임금 등 방만한 경영도 입방아에 올랐다. 2008년 한나라당 이명박 정부의 등장은 MBC의 분열을 가속했다. MBC는 노조 활동에 비판적인 이명박 정부를 적대시했다. PD수첩의 광우병 보도는 MBC의 신뢰도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해 말 MBC 뉴스 시청률은 SBS보다도 뒤처졌다. 당시 MBC 노조는 광우병 보도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실체가 밝혀진 이후에도 사과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노조의 이 같은 강경한 태도는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를 낳고 있다.

지난해 2월 ‘MBC 공정방송 노동조합’은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다른 목소리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며 “MBC는 신뢰성 상실과 불공정 보도, 편파방송으로 인해 국민과 시청자로부터 외면받고 있다”고 말했다. 방송문화진흥회의 김우룡 신임 이사장은 지난해 8월 “MBC가 극복해야 할 시급한 과제는 경영·콘텐트·신뢰의 위기”라고 지적했다. 서강대 최창섭 교수는 “신군부가 공영방송 강화라는 명분으로 민영 MBC를 공영방송 MBC로 바꿨지만 결국엔 노조가 경영하는 ‘노영방송’이 되고 말았다”며 “신군부의 방송 장악은 한국 방송산업의 공정성과 다양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신군부의 방송 장악이 남긴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셈이다.

박혜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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