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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下. 꼭꼭 숨는 환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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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중앙일보 기획취재 지난회 보기

30대 후반의 중견 화가 L씨. 2년 전 에이즈 검사를 받기 위해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소문나지 않고 철저한 신분 보호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건소 검사비용은 무료여서 왕복 비행기표 값이면 족했다.

그후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L씨는 아직도 일본에 머무르고 있다. 치료를 받기 위해선 실명 관리되는 한국 시스템에서 자신이 어렵게 쌓아올린 모든 기반이 허물어질까 두려워서다.

L씨는 최근 한 에이즈 민간단체에 "비공개로 치료받을 방법이 없겠느냐" 며 눈물로 호소 중이다.

에이즈 검사를 받기 위해 일본이나 미국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양성 판정을 받더라도 신분노출 없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데다 비용도 국내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검사 전문 브로커까지 등장했다. 국내에서 제법 얼굴이 알려진 사람들은 이들의 중개에 의존한다는 게 한국에이즈퇴치연맹측 설명이다.

에이즈는 점점 해외.지하로 숨고 있고, 때문에 관리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정부가 밝힌 '1천1백97명' 의 감염자 통계(8월 21일 현재)를 현실로 믿기엔 구멍이 너무 많은 것이다.

1백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매춘 여성에 대한 검사도 실효성이 없긴 마찬가지.

실제 국내 에이즈 감염자수에 대해 '5천~6천명(연대 세브란스병원 김준명 교수)' '1만1천~1만2천명(한국에이즈퇴치연맹)' '1백배도 가능(대한에이즈예방협회 관계자)' 등의 갖가지 예측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소위 '1197의 허구(虛構)' 다.

◇ 해외 원정검사 러시〓일본인 통역관 H씨(45)는 지난해 초 일본을 방문한 한국에이즈퇴치연맹 관계자와의 술자리에서 충격적인 얘기를 흘렸다.

"현재 일본에서 에이즈 판정을 받고 내가 적절히 관리해주는 한국인 저명인사만 17명" 이라는 것이었다.

H씨는 "이름만 대면 깜짝 놀랄 사람들도 있지만 오늘은 여기서 끝내자" 며 입을 닫았다. H씨는 "나처럼 한국인 저명인사와 병원을 연결시켜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고 말했다는 것.

마약 주사기 사용으로 에이즈에 감염된 국내 첫 케이스인 30대 중반의 P씨. 지난해 초 이미 일본에서 에이즈 양성판정을 받고 귀국했다.

얼굴을 드러내길 거부했던 그는 이달초 폐렴으로 몸무게가 10㎏이나 줄고 나서야 병원 문을 두드렸다.

서울대 감염내과 오명돈 교수는 "지난해 일본 정부에서 운영하는 국제의료센터를 방문했을 때 한국인 몇명이 비밀리에 에이즈 치료를 받고 있는 걸 목격했다" 며 일본인 교수로부터 한국이 치료를 맡는 게 어떠냐는 제의를 받았다고 말했다.

국립보건원 이종구(李鍾求)방역과장은 "우리나라에도 이제 익명 검사가 점차 활성화하고 있다" 고 말한다.

그러나 일단 양성판정을 받으면 철저히 실명등록 관리가 되기 때문에 신원보장이 가능한 일본.미국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병원마다 다르지만 검사비용은 많아야 10만원에 치료비도 한달 1백만원선이어서 큰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해외에서 에이즈 판정을 받은 저명인사들이 국내 병원측에 목돈을 쥐어주고 비밀리에 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는 게 공공연한 비밀.

서울 모 대학병원의 한 고참 간호사는 올해 초 한 시민단체를 직접 방문, "담당의사가 해외에서 에이즈에 걸린 기업체 사장을 특실 병동에 두고 다른 병으로 위장하고 있다" 고 제보했다.

◇ 허술한 '매춘여성' 관리〓현재 정부가 정기적으로 에이즈 검사를 하는 매춘여성은 전국적으로 3천4백여명. 정부의 '노력' 덕분인지 매춘여성의 감염 건수는 지난해 1건, 올해는 없는 등 매년 급격한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1백만명 이상으로 추산되는 매춘여성들의 수를 감안하면, '통계의 허상' 일 뿐이란 게 전문가들의 지적. 매춘여성에 대한 검사가 대개 윤락촌을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출장 마사지 등의 신종 매매춘이나 여관.이발소 등에서의 은밀한 매춘엔 무방비 상태라는 것이다.

한국에이즈퇴치연맹 권관우 사무총장은 "극히 일부의 샘플만 뽑히기 때문에 건강한 매춘부들만 자진해 검사를 받는 오류도 있다" 고 말했다.

◇ 에이즈 대란(大亂)올 수도 있다〓전문가들은 한국의 에이즈 상황을 '폭풍전야' 에 비유하고 있다.

"감염자수가 급격하게 점프하기 직전 상황" (삼성서울병원 송재훈 교수.감염내과)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90년 2백여명이던 한해 신규 감염자수가 91년 4백50명으로, 태국은 87년을 기점으로 감염자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는데 ▶다양화된 매춘경로▶주부들의 감염확대 등 현재 우리의 상황이 그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기획취재팀=이상복·서승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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