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황국 선전물이 교과서라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이라는 일본의 우익 역사학자단체가 문부성에 검정의뢰했다는 중학교 역사교과서의 전모가 드러났다.

그동안 논란이 돼온 일부 역사교과서들의 부분적인 역사왜곡 차원을 넘어 철저히 황국(皇國)사관에 맞춰 재구성된 역사선전물을 보는 느낌이다.

이 책은 한일병합에 대해 '동아시아를 안정시키는 정책으로 구미열강의 지지를 받았으며 원칙에 따라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 고 기술, 강제합병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또 '한반도는 일본에 대해 끝없이 들이대어진 흉기가 될 지 모르는 위치관계' 라며 강제합병을 합리화하고 있다.

여기에 '대동아 전쟁' 을 동남아.인도.아프리카에 독립에 대한 꿈과 용기를 북돋워준 침략전쟁으로 미화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인종간 대립을 고취하는 매우 위험한 극우적 역사관이다. 예컨대 러일전쟁에 대해 '근대국가로 탄생한지 얼마 안되는 유색인종 국가 일본이 세계 최대 육군대국이던 백인제국 러시아를 이긴 것은 세계에서 억압받던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끝없는 희망을 주었다' 고 적고 있다.

또 고사기(古事記)·일본서기(日本書紀) 등에 나오는 신화를 자주 인용하고 일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교육칙어' 를 소개하는 등 국수주의적 황국사관으로 일관하고 있다.

패전 이후의 역사관을 '자학(自虐)사관' 이라 비판하고 '민족에 따라 역사는 다른 것이 당연하다' 는 이른바 제멋대로의 '자유주의 사관' 의 결정판을 보는 듯하다.

문부성이 어떤 판정을 내릴지는 미지수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책이 버젓이 교과서란 이름을 달고 문부성에 검정의뢰될 수 있는 일본의 이상한 분위기다.

총리라는 사람이 '신(神)의 나라' 발언으로 물의를 빚고, 걸핏하면 역사왜곡 망언으로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이 직선제 총리후보 1위로 꼽히는 현실에서 이런 책이 나올 수 있는 게 아닌가.

글자 몇자 고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본다. 이 책은 부분적 수정을 통해 검정을 통과하기에는 뒤틀린 사관에 입각한 역사왜곡의 정도가 너무 심하다.

동아시아의 근본적 화해는 일본의 제대로 된 역사인식과 솔직한 과거사 반성, 사죄 없이는 불가능하다. 올바른 역사교육을 통해 후세에 평화와 협력의 미래를 넘겨줄 생각이라면 일본은 절대 이 책을 교과서로 인정해선 안된다.

우리 정부도 적극 나서야 한다. 다각적인 외교채널을 통해 이 책이 검정을 통과하는 사태를 막아야 할 것이다. 북한 및 중국과의 공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울러 이 기회에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처럼 남북한과 중국.일본의 양식 있는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후세에 물려줄 동아시아 역사 공동교과서를 만드는 방법도 적극 검토해볼 일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