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24시] 두 얼굴의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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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일본 히로시마(廣島)시는 6일 추모 분위기에 휩싸였다.

55년 전 사상 처음으로 원자탄이 떨어진 날을 맞아 곳곳에서 진혼'(鎭魂)'행사가 줄을 이었다. 아침 일찍 시작된 시 주최 평화기념식에는 5만여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그 중에는 몸이 성치 않은 고령의 피폭자들도 적지 않아 금세기 마지막 기념식이 갖는 무게를 엿보게 해줬다.

행사 개시 15분 뒤 사이렌과 종이 일제히 울리면서 도시는 깊은 기도속으로 빠져들었다.

기념식은 핵무기 폐기와 평화에 대한 결의로 가득찼다.

아키바 다다토시(秋葉忠利)시장은 평화선언문에서 "피폭 체험을 인류 전체의 유산으로 계승하자" 고 호소했다.

그러면서 "연필 한 자루가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생명' 을 쓰고, 그 다음에 '핵무기 폐기' 를 써내려갈 것" 이라고 말했다.

식사에 이어 "손쉬운 곳에서부터 평화를 쌓아 가자" 는 어린이 대표의 '평화 맹세' 도 낭독됐다.

식장을 찾은 가쓰키 무라오(香月村男.80)는 피폭 참상을 회고하면서 "인류에게 평화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고 했다.

히로시마뿐 아니다.

도쿄(東京)를 비롯한 각지에서도 크고 작은 추모 행사가 열렸다. 대부분 젊은 세대한테 핵무기의 공포를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9일에는 역시 원자탄이 투하된 나가사키(長崎)시에서 핵무기 폐기 결의가 이어질 예정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핵무기에 관한 일본의 전체 모습은 아니다.

핵무장론은 점차 고개를 들고 있다. 움직임은 동시다발적이다.

현재 문부성이 검정 작업을 벌이고 있는 한 중학교 공민(도덕)교과서는 핵 보유의 정당성을 내비쳤다.

우파 학자단체인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이 편집한 이 교과서는 인도.파키스탄의 핵 보유와 북한 핵개발 의혹을 들어가며 '일본에도 현실적 대응이 요구된다' 고 명기했다.

교과서는 '핵무기 폐기가 정의인가' 란 항목을 넣어 핵폐기론도 비판했다. 이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할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핵보유 용인론을 쓴 교과서가 출판된 것은 심상치 않다. 핵무기나 핵항모 개발에 관한 특집을 실은 시사지가 틈틈이 나오는 것도 주목거리다. 지난해는 현직 방위청 정무차관이 핵무장 필요성을 제기해 파문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핵 무장론이 핵 폐기론보다 힘을 얻어가는 분위기다.

히로시마 기념식이 벌어질 무렵 도쿄에선 국권 회복을 외치는 우익단체 선전 차량이 거리를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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